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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Sep 01. 2023

당신은 누구입니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에 부쳐.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진짜 삶은 생에서 내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분석하고 이해해야지만 그다음에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전까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믿기로는. 내 인생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존재하며,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감정 말고 무엇이 있을까? 감정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모태신앙으로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으면서 아주 막연한 믿음에 대한 개념이 생겼는데, 어떤 목사가 말했다. 믿음은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나를 평생 의심하기로 결정한 셈이었다.


그 생각은 직장을 다니다가 우연히 칼럼 때문에 물리학을 접하며 중증이 되어갔다.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이라는 책을 읽고 볼트먼 두뇌라는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화학적 분자의 결합으로 쪼개어 본다면, “내가 집 옥상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라는 사건은 어떤 확률적 현상에 불과하며, 드넓은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똑같은 화학적 결합으로 발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사건과 나의 존재 중 누가 진짜일까 하는 질문. 밀란 쿤데라가 “한 번뿐인 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말했을 때부터 세계를 믿을 수 없었는데, 이젠 나도 실체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 나는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내 인생은 나도 모르게 30년이나 밀려 버렸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내 조그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너무 많은 과업이 눈앞에 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 버렸다. 나는 내 인생이 흘러가는 걸 우두커니 보고 있다. 나는 연못가에 누워 있는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인지 알 수 없다. 가끔은 내가 아주 깊이 침잠하고 있을 때, 심해로 빨려가는 듯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그만큼 좋아한 적이 없다. 끝까지 파고드는 ‘덕후’의 기질도 없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냥 나는 속이 텅 빈 사람이 아닌가? 취향이란 말이 지긋지긋해질 지경이다. 그나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다. 내가 가끔 혼자 주저앉아 엉엉 울며 세상 모든 것을 애도한다고 했을 때, “그게 김예린의 귀여움이지”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내 걸음걸이가 너무 빠르다고 말해주는 애인이 있었다. 내가 아마조니언 같다고 말해주는 직장 동료가 있었다. 내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라고 말해주는 또 다른 동료가,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또 다른 친구가, 어릴 적 내가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줬던 엄마가 있었다. 그럴 때 내 머릿속의 복잡한 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나를 가지치기해 주는 건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울 속의 나를 볼 때,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멈출 수가 없다. 나보코프를 전공한 대학 시절 교수님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볼 수 있는가? 아니. 거울 속의 당신도 당신이 보는 하나의 상에 불과할 뿐, 진짜 당신은 아니다. 당신의 시선으로 보는 당신은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당신과 다르고, 그 어떤 것이 진짜인지는 누구도 구별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당신은 진짜로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오르는 심상들을 만날 때, 내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과 만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발견한 새로운 생각은 이것이다. 심해로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아주 풍부한 세계를 만나고 있다고. 그저 가라앉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안으로 깊어지는 거라고 처음 생각해 봤다. 그 안에는 아주 다채로운 감정들이 있고,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애매모호한 시공간에 마음 둘 곳도 있었다. 이런 것이 나를 확장시켜 준다고 믿게 됐다. 세계를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살면서 내 주변의 세계와 나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나는 내 귀여움을 발견한 친구의 시선 속에 있다. 헤어진 연인이 내게 남긴 미련이라는 감정 안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내가 미처 모르는 나의 여러 가지 상에 분산돼 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산다는 건 나를 알아가는 선형적 사건이 아니라 그저 제자리걸음과 확장을 반복하는 일이다. 언젠가 똑같은 결정을 반복하려는 순간 나는 생각한다. 내 원을 이렇게 닫아버리면, 그 원의 접점 밖에 있는 무수한 많은 것에 닿을 수 없게 되나? 그럼 조금 더 큰 원을 그려볼까? 이 과정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에 있다. 심해 속에 있다. 그러니 내 인생은 나선을 그리고 있다. 위로 올라가는지, 아래로 내려가는지, 좁아지는지 넓어지는지도 사실 모른다. 큰 원을 그린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흘러가는 걸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당신은 ‘나’라는 자의식을 믿을 수가 있는가? 의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 목숨은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 뜨겁게 올라오는 피를 보면서 생각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이구나. 고통받을 때 내가 날카롭게 선명해지는구나. 환희를 느낄 때 나는 공중에 퍼져 있구나. 분노를 느낄 때 나는 터질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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