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우선, 지면을 빌려… 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시작을 해야겠다. “너는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던 시기는 지나갔는데,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가 져 있다. 사람들과 모여 대화하다가 누군가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공황이 올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생각해?”가 두 번째로 많이 듣게 된 질문으로서, 요즘 가장 골치아파하는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로서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는지, 페미니스트로서 절망스러운 사안에 대해 얼마나 유쾌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지, 내가 ‘올바른’ 페미니스트가 맞는지 검증당하는 순간들이 지겹다. 모든 사안들이 내 손바닥을 벗어나 있다. 정확히는 그러니까, 올바른 페미니스트로 인정받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지겨운 것이다. 실은 아무도 나를 검증하는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 혼자만 나를 증명하고 싶어할 뿐일지 모른다.
스무 살에 대학에서 <페미니즘의 이해>라는 개론학을 듣고 나서 나는 페미니즘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그 때부터 여성학이 가장 진보적인 학문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모든 상황을 뒤집어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고, 놓치기 쉬운 중요한 디테일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됐다. 모두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에 괜찮지 않아하는 한두 명의 시선들을 의식하게 됐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나는 그전보다 비교적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 됐다. 반면 스무 살에 페미니즘은 내게 너무 감당하기 버거운 주제였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 시기였으니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외로웠다. ‘왜 그렇게 경도되어 있느냐’, ‘왜 자꾸 가르치려 드느냐’, ‘뭐가 그렇게 불편한 게 많으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나라는 세계의 명암이 개기일식처럼 바뀌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나 말고 페미니즘 안 하는 사람들이 모두 페미니즘을 하길 바랐다. 선민의식에 빠진 것이다. 그 선민의식은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곤 했다. 내 친구들이 화장하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기르고 힐을 신고 다니는 게 불편해졌다. 그러면서 여름방학이 되면 나도 다이어트를 하고 네일아트에 푹 빠지곤 했다. 혼란스러웠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를 지나며 내가 겪었던 모순적인 순간들에 이름이 나붙었다. 개념녀 코르셋. 우습게도 나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띠부띠부씰처럼 떼었다 붙였다 하며 마음 속 거리두기를 한다.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 클럽에 갈 때 시선 강간을 당하면 “난 페미니스트야!” 악을 쓰고 싶어진다. 마음에서 멀어진 페미니즘을 되찾으려는 사람처럼, 페미니즘에 미안한 마음을 회개라도 하는 사람처럼. 시간이 지나며 <나쁜 페미니스트>,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등의 책을 접했다. 순간적으로나마 글에 동의했지만 온전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매력 자본’을 이야기하면 누군가에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게 되었고, 치아미백 클리닉에 갈 때는 페미니즘이라는 명찰을 잠시 집에 놓아두고 싶었다.
자조적인 농담들로 한 시절을 버텼다. 이를테면, 제모가 너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나는 페미니스트라서 제모 안 하는 걸로 하겠어”라고 하면 그게 너무 웃기고 좋았다. 남자친구가 한남처럼 굴어서 헤어질까 고민된다는 말에 또 예의 그 친구가 “그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지. 한남을 만나서 너가 개종을 시켜야지!”라고 하면 안도감에 깔깔 웃었다. ‘한녀’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와 동어처럼 쓰기 시작했다. 혐오에는 혐오로 맞대응했다. 극한의 한녀이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견딜 수 있고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이 정도 아노미 현상을 겪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남혐이라는 말이 싫은 지경을 지나, ‘그래, 나 남혐한다’고 뻔뻔하게 말하게 됐다.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워졌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여자이다. 나는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사람이다. 나는 이 사회가 너무 싫지만 이 사회의 수많은 관계망 속에 얽혀 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싫지만 수많은 광고에 노출되어 살고 있듯이, 고고한 페미니스트가 되기엔 숨 쉬듯 발생하는 여성혐오 속에 살고 있다. 그냥 페미니즘에 호들갑을 떨지들 않았으면 좋겠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페미니스트란 이름을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역차별과 남혐이라는 말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여자들(을 비롯한 사회 소수자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았으면 좋겠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원래 명성을 되찾고 싶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여성혐오적 시선을 숨기고 있을 때 그 영화를 싫어하면서도 여전히 영화에 대해 좋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여전히 너무 털털하거나, 너무 야한 사람이지 않길 바란다. 페미니스트이면서 여전히 유쾌하고 가벼운 사람이고 싶다. 난 주변부의 시선이고 싶지 않다. 매 순간 튀지 않기 위해 잠자코 있기 싫다. 여성인 내가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우리가 원하는 게 복수가 아니라 평등이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요즘엔 애인이 가끔 농담이랍시고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생각해? 역차별 아니야?”라고 묻는다. 우리 앞에 남자가 크고 비교적 무거운 짐을, 여자가 손가방과 겉옷 하나를 들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의 위트를 위트로 받아치지 못해서 서럽다. 페미니스트로서 아직 내게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 밤에 오도커니 앉아있다가 뒤늦게 적절한 대답이 떠올랐다. “저 정도 역차별은 견뎌야지.” 아, 이제는 내 시니컬한 자아를 내려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