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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Nov 12. 2023

재능 없는 일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재수없게 시작해서 미안합니다만.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모든 걸 잘했다. 받아쓰기 시절부터 고등학교 내신까지 늘 성적이 좋았다. 교내 사생대회나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 늘 입상을 했고, 글짓기 대회를 휩쓸곤 했다. 중학생 때는 도 주최 백일장에서 시 분야 대상을 받았다. 뜀틀도 잘하고 철봉도 잘하고, 어릴 때부터 수영도 배웠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악착같이 연습해 체력장에서도 모두 1등급을 땄다. 수업 시간에 나는 ‘헤르미온느’ 같은 존재였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모조리 내가 정답을 말하고 싶어서 번쩍 번쩍 손이 올라갔다. 친구가 없어도 괜찮았다. 나는 공부를 잘 해서 선생님과 엄마의 눈에 들면 그만이었다. 사춘기 시절 내게 피어 프레셔보다 무서운 건 ‘못하는 것’ 이었다. 


그런 내게도 못하는 게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달리기였다. 달리기는 여전히 해본 적이 없다. 러닝이 유행을 타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강공원이 명물인 동네에 3년째 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못하는 건 안 하면 되는 거였다. 대학에서는 문학 전공이었으니 수업 시간에 종종 받는 쪽글 숙제가 내 시험지였다. 거기에서 A라는 코멘트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직성이 풀렸다’가 꼭 맞는 말이다. 처음에는 책을 읽고 글쓰는 연습이 돼 있지 않아 우왕좌왕했는데, 1학년 2학기 중간 고사에서 최고점을 받으면서 선생님 눈에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고, 모든 것을 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교양 수업에서 C를 받아도 괜찮았다. 내가 노력하지 않은 거니까, 포기한 거니까.


졸업하고 매거진 어시스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글을 곧잘 썼으니 매거진 어시스턴트 일도 그렇게 버거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패션 매거진’으로 옮기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글 쓰는 일이 전부인 줄 알았던 피처 에디터도 화보를 찍어야 했다. 제품 화보는 자신있는데 사람을 두고 찍는 화보는 영 소질이 없었다. 편집장님과 다른 에디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악착같이 4년여를 버텼다. 잘하고 싶었고, 재미를 느꼈으며, 점점 더 잘하게 될 거라 믿었다. 일을 그만두게 될 때까지는. 퇴사를 결심한 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정작 내 ‘버튼’을 누른 건 내겐 나름 큰 의미였던 인기 아이돌 멤버 단독 화보에 대한 편집장님의 코멘트였다. “사람이 너무 찌질해 보여.” 나는 뒤돌아서 사진 인화지가 담겨 있던 박스 테이프를 북북 뜯은 다음 분에 못이겨 편집장님을 찾아갔다. 이제까지는 잘 참아왔는데 그간 쌓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만두겠다고,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나아지지 않으니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비주얼에 재능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괜찮아졌는데 왜 혼자 울까요?” 45분 대기 끝에 만난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피곤에 쩔어 멍한 눈으로 나는 “그러게요…”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난 두세달 간 계속 괜찮다고 했고 정말 괜찮았는데 엊그제는 선생님에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생일 같은 날이 문제였다. 거의 50만원어치에 달하는 고급 와인들을 공짜로 먹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와인 바를 나서는 순간 눈물이 주욱 흘렀다. 눈물은 한 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았다. 이유 없이 허망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혼자 있을 때도 스스로를 괜찮다고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일상에서 아주 작은 성취들을 이루는 게 도움이 되죠.” 원하던 킨츠기 수업도 등록했고, 수영도 다시 조금씩 다녀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선생님이 가만가만 덧붙였다. “중요한 건, 잘하지 못해도 계속해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너무 어려운 일인데요…” 만다라 색칠하기, 집 꾸미기, 요가, 수영, 빈티지 사업… 잘 하다가 손을 놓아버린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때가 되면, 잘못 묶은 매듭처럼 스르르 흥미가 풀려버리곤 했다.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재능이 없는 일을 좋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건지,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미 망한 일을 계속 이어나가는 법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곧잘, ‘이렇게 망한 인생인데 더 살 필요가 있나?’로 비약한다.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리셋 증후군, 아니 이미 망한 판 그만 접어버리고만 싶었다. 종료하기 버튼을 딸칵 누르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못 살고 있다고 해서 그만 살 건 아니니까, 누구도 누구에게 ‘잘 못 살고 있다’고 말할 자격은 없으니까, 처음 사는 인생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 소소한 마음으로 버텨봐야 하는 건가? 그럴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어떤 영화적인 장면이 있다. 지하철에서 앉아있는 승객에게 건조한 말투로 ‘발 좀 치워주세요’라고 말하고 꼼꼼히 비질을 하는 환경미화원.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내심 생각하고 있다.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삶의 병기 같은 마음가짐.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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