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은색 자전거를 추억하며.
아빠는 말없이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인생 첫 자전거를 시작한다. 혼자 걷게 되는 일은 기억을 못 하지만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순간은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일에는 유년 시절의 성취감이 녹아 있다. 내 발로 페달을 굴려 앞으로 나아가는 일, 그 홀가분한 순간.
네 살인가, 다섯 살 때부터 깡촌에 살았으니 소꿉친구라고는 연년생 오빠와 오빠 친구들이 전부였고, 마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빠를 따라서 곤충을 잡거나 개울가에서 노는 일, 그리고 자전거를 타는 일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자전거 타기를 정말 즐겨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내 자전거를 처음 사게 됐다. 오빠랑 나, 그리고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은 자전거를 타고 1km쯤 떨어진 동네 농협까지 갔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맹리, 농협이 있는 동네는 행군리. 짧은 거리지만 체구가 작고 다리도 짧을 때였으니 우리에겐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딱 좋은 거리였다. 거리는 온통 논밭이었다. 중간지점에 양봉하는 집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경쟁적으로 달리다가 논에 빠져 엉엉 울던 일, 시골애답지 않게 개를 무서워하던 내가 집에 가다 말고 개를 만나 오던 길 되돌아간 일, 오빠가 동네 놀이에 동생을 껴주지 않아 (역시나 엉엉 울며) 자전거를 끌고 집에 가던 동생이 개울에 빠져 아찔했던 순간, 동생과 놀이터에서 노는데 옆집에서 산책하라고 풀어둔 사냥개 네 마리가 놀이터로 달려오기에 겁을 먹은 나와 동생이 논을 가로질러 우리 집 마당에서 일을 하던 아빠를 향해 “아빠~!” 소리친 끝에 상황파악을 한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긴 막대를 휘휘 저으며 우리를 구하러(?) 온 일까지, 내 유년 시절의 기억에는 늘 자전거가 있다.
서울로 오면서부터 자전거를 탈 일이 없어졌다. 금세 자전거 타는 법을 잊었다. 자립을 하면서 다시 ‘따릉이’를 타게 됐다. 다만 예전에는 겁을 모르고 달리곤 했던 내가 커브를 돌 때에도, 사람을 피할 때에도 쩔쩔맸다. 자전거 초보로 돌아가니 길에서 사람을 만나도 욕부터 나왔고, 요령껏 피하려다 사람을 쳐서 열 번씩 사과한 적도 있다. 자전거를 같이 타곤 하던 직장 동료가 늘 앞장섰고, 그가 자전거를 지그재그로 타며 오페라를 부르는 동안 나는 짐짓 침착한 척 속도를 내었다. 1년권을 끊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도 어린 시절 타던 자전거의 자유로운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만큼 길이 휑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때만큼 내 몸에 맞는 가벼운 자전거가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때만큼 잃을 게 없는 내가 아니라서 그런 거다.
자전거와 소홀해지고 나니 내 몸 일부가 사라진 것처럼 이상하다. 어린 시절에는 말 그대로 내 몸의 일부인 양 자전거를 놀렸는데. 얼마 전에는 자전거 숍을 취재하고 왔다. 미국과 일본에서 1970년대에 유행하던 BMX 자전거(영화 <E.T.>에 나오는 자전거가 대표적이다)의 복각 모델을 파는 곳인데, 매니저가 아주 자전거 덕후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자전거랑 부품을 모두 합치면 서른 대쯤 된다고 했다. 유년 시절의 모험을 떠올리게 해주는 존재라서 자전거가 좋다고 했다. 집에 와서 그 인터뷰를 다 적은 뒤에 말로 표현 못할 향수가 생겼다. 어떤 말을 붙여도 그 인터뷰에는 꼭 뭔가 하나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그 허전한 무언가를 채우려 이만큼 글을 적었는데도 왠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지금 나사 빠진 자전거. 아무도 없는 골목을 휘적휘적 누비며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지만 혼자서 일어설 힘이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