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김예린은 그 속에서 원 없이 놀았다.
윤기나는 원목으로 빙글빙글 꼬아 만든 지지대에 때 탄 꽃무늬 천으로 마감한 흔들의자. 커다란 창문과 베란다가 있던 아파트에 거북이가 늘 탈출하던 네모난 어항. 아주 어릴 적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여러 번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기억하는 나의 세 번째 집이 아직까지는 나의 진짜 고향이라 믿고 있다.
그야말로 꽃피우는 산골, 철따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나던 곳.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였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았다. 아버지는 손수 나무를 잘라 대문을 만들고, 그 위로 아치형 지지대를 세워 장미덩굴까지 만들었다. 그 집에 처음 도착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네 살, 다섯 살이었던 나와 오빠는 미처 옮기지 못한 피아노 뚜껑 위에 나란히 앉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고 있었고 엄마와 아빠는 부지런히 짐을 실어 날랐다. 엄마는 막내를 임신 중이었고 두 계절이 지나 가을이 시작될 무렵 동생을 낳았다. 마당에는 외할아버지가 주목 나무를 심었다. 우리는 이른 봄의 산딸기부터 앵두, 복숭아, 자두, 그리고 오디까지 부족함 없이 먹고 자랐다. 여름이면 봉숭아물을 들이고, 겨울이면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다가 맞은 게 서러워서 울었다. 마을에는 놀이터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옆에 있는 냇가를 더 좋아했다. 사실상 오수가 흘러가는 개천이었지만, 당시 마을 인구가 너무 적어 물은 가재가 잡힐 정도로 깨끗했다. 수양버들이 바람따라 흔들리는 동화 같은 냇가에 가면 꼭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집에 들어왔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바로 뒤에 공터가 있었고 아주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나중에 그 교회는 버려졌고 우리는 그 옆 오솔길을 따라 산에 들락거리곤 했다.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와 삼촌, 사촌동생들도 모두 우리 집에 놀러오곤 했다. 집에서는 나무를 타고 노는 일이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였는데, 오래된 복숭아 나무에 늘어진 가지 하나는 우리가 하도 매달려서 나중에는 결국 부러졌다. 어느 날에는 마당 끝자락에 우리 삼남매를 상징하는 나무를 하나씩, 세 그루 심었다. 나무처럼 잘 자라라고, 그리고 커서는 아낌없이 주라는 어른들의 뜻이었을 거다. 나는 정말로 나무를 참 좋아했다. 그 시절 내가 끄적이던 시에는 늘 나무가 등장했으니까.
오빠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그때부터는 2~4년 주기로 계속 이사를 다녀서 그 집에 대한 것들은 아주 파편적으로만 기억이 난다. 첫 집은 양재동이었는데 베란다에 해가 너무 잘 들어서 쩐내가 났다. 엄마는 늘 학교에 늦는 나를 위해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며 기어이 고봉으로 밥을 먹여주었다. 엄마는 이따금 사과파이를 구웠다. 오빠가 내 생일에 분홍색 액세서리함을 선물해줬다. 그 집에 있을 때 엄마는 오빠의 교과서를 여러 권 찢었다. 그 다음에는 개포동으로 이사했다. 나는 거기에서 대학교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술을 과하게 마시고 아침에야 집에 도착했는데, 토할 것만 같아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 근린공원에서 30분을 앉아있었다. 그 집에서 동생이 친구와 놀다가 발목을 크게 다쳐서 목발을 짚고 다녔다. 아빠가 오빠의 노트북을 부쉈다. 엄마는 늘 라디오를 틀어뒀는데,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너무너무 놀라서 발을 굴렀다. 우리는 다시 양재동으로 이사했다. 쥐가 나와서 쥐덫을 놓았다. 방이 세 개밖에 없어서 하나는 부모님 방, 그리고 삼남매가 공부방과 침실을 같이 썼다. 그 무렵에는 오빠와 내가 수시로 다투곤 하다가, 아예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내기에 이르렀다. 내가 남자친구 때문에 하도 속을 썩여서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둥,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다는 둥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곧바로 잠들던 내가 처음으로 불면증을 겪은 게 그 집에서였다. 다행히 우리는 곧 이사했다. 이번에는 수서로 간다고 했다.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고 마트와 교회가 모두 가까운, 살기 좋은 동네였다. 그 집에서는 스물 다섯 살부터 내가 독립하기까지 쭉 살았다. 큰 창문 너머로 광평대군 묘가 보이는, 경치가 아주 좋은 집이었다. 사는 내내 집안에 개미가 들끓긴 했지만. 그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공황장애를 겪고 난리를 피워댔던 것도 그 집에서였다. 수서로 이사하면서 내 독방을 가지게 됐는데, 방에 결로가 자꾸 생겨 벽지를 다 뜯어냈다. 시멘트 벽에서 나오는 외풍을 견디며 잠을 자던 겨울, 크리스마스 무렵에 아빠가 갑자기 다이소에서 가랜드를 사와 내 방에 걸어주었다. 내가 이사하고, 부모님도 곧 성남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에 다시는 못 가게 되었을 때,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그래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혼자 처음으로 살게 된 집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 30세대가 몰려 있는 다가구인데, 집주인이 돈이 없어 집이 강제 경매에 넘어갔다. 나이가 드니까 다들 결혼해 집을 장만하거나, 청약에 당첨이 되거나, 해외로 넘어간다. 살던 집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돼 원치 않게 이사한 친구도 있었다. 부모님은 다행히도 서울에 집을 구하셨다. 새로운 둥지에서 여전히 똑 같은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 고향은 어디일까? 낡은 흔들의자가 있는 구산동 집은 아마도 재개발됐을 것이다. 잠깐 살았던 일산의 아파트는 가격이 엄청 올랐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살던 시골 동네는 이제 엄청나게 많은 공장이 들어서고, 전원주택 단지가 개발돼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의 패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그 시골집으로 혼자 도망쳤던 기억이 마지막이다. 이제는 그 냇가에 수영장이라는 팻말 따위 없어졌다. 이웃집에는 막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는데,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들인 엄마가 와서 아이를 데려갔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들었다. 그 아이도 나처럼 그 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할까? 땅거미 지기가 무섭게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손녀딸 이름을 부르던 그 할머니 목청이 여전히 또렷하게 귓가에 들린다.
우리는 파산하고 도망치듯 시골로 이사온 중년의 부부에게 그 집을 아주 싼 값에 세줬다. 그 아저씨는 외할아버지가 심은 주목 나무를 말도 없이 잘라버렸다. 그 집에 가 보고 싶지만, 바뀐 모습을 마주하기 싫어서 가지 않는다. 내 고향은, 내 고향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이제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내가 살면서 느낀 극한의 두려움, 찰나의 기쁨, 처절한 절망과 슬픔, 새 삶에 대한 희망 같은 건 거기에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 장소들을 생각한다. 그 장소들에 내 기억과 감정들을 외주 준 것만 같다. 여기에 미처 적지 못한 많은 일들이 순서를 모르고 떠오른다. 그 동네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집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남의 집이 되었고, 처음부터 줄곧 남의 집이었지만.
부모님은 성남에서 잠깐 주공아파트에 사셨다. 나는 주공아파트에 살았던 기억은 없지만, 이상하게 그 아파트에 정이 갔다. 주공아파트, 거기에는 이제 새 삶이 시작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이사왔던 사람들의 감정이 남아있다. 그건 아마 재작년이었나, <봉명주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 때문이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그 주택단지의 오래된 나무와 꽃들이 다 잘려나갔다. 손자 손녀까지 보며 30년을 넘게 그 집에 살았던 노년의 부부가 처음 이사오던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란다에 작은 정원에 가까울 만큼 화분을 많이 키우는 할머니가 문득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벽에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 아이의 낙서가 있다. 그 집이 철거되기 전, 수십 년동안 잘 가꾸어진 수목을 옮겨심기 위해 사람들이 왔다. 마당에 아이 키만큼 자란 찔레를 캐던 여자가 말한다. “이거 이만큼 키우기가 쉽지 않은데.” 인부들이 힘을 합쳐 한아름으로도 다 감쌀 수 없는 수양버들을 쓰러트린다. 나는 아주 잠시,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