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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Jul 14. 2024

개망초

천상의 풀

           

 한낮의 햇살이 공격하듯 쏟아져 내린다. 비 온 후, 습기를 머금은 비릿한 풀냄새가 훅 올라와 얼굴을 덮는다. 산책길 둔덕에 하얗게 눈이 내린 듯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들꽃이 바람에 살살 흔들리는 한 순간은 어디나 예쁘다.

    

 개망초는 두해살이풀이다. 오래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은 참 많다. 망초, 왜풀, 개망초, 계란꽃, 망국초,.. 초나라가 망한 곳에 난 풀이라 망초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하도 지천에 피어나는 흔한 꽃이라 해서 개망초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개’는 흔하거나 본래 것보다 못나거나 다른 모습에 붙이는 접두어이니 그 설이 맞을지도 모른다. 주로 식물 이름에 많은데 개망초, 개나리, 개머루, 개오동, 개솔새, 개옻나무 등이 있다. 제주에서는 천상쿨로 부른다.


 망초류가 워낙 번식력이 왕성하고 생명력이 강해서 농민들에게는 ‘망할 놈의 꽃’인 셈이었기에 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퍼뜨린 꽃이라는 설도 있다. 일제침략시기에 못 보던 풀이 갑자기 온 들판에서 자라기 시작하자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는데.  ‘왜풀’이라는 이름에서 유입경로가 읽힌다. 그런 여러 가지 설과는 달리 원산지는 북미라서 북반구 전역에 분포하는 귀화 식물이다.


 부정적인 이름과는 달리 망초 꽃의 꽃말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화해’,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해 준다.’는 긴 꽃말을 가진 꽃이다. 멀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망초 꽃을 선물하면 연인이 다가올까. 아차, 꽃 이름 때문에 연인이 멀리 가버릴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친구와 남산길을 걸을 때, 여린 망초 잎을 뜯어준 것을 무쳐먹은 적이 있다. 망초 나물을 처음 먹어보니 비듬나물이나 부지깽이나물만큼 부드럽고 촉촉한 맛은 덜했다. 이른 봄 춘궁기에 들에서 나는 풀들이 식량이 되다 보니 몸에도 입에도 풀물이 들었을 옛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그려졌다.

    

 뙤약볕에 무성하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개망초는 어쩐지 슬퍼 보인다. 이상하게 폐허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을 잘도 알고 둥지를 트는 꽃이다. 아기 무덤이 있거나, 사람이 살다 떠난 집에는 어김없이 개망초가 무성하다. 개망초가 그득한 폐가 마당에 한여름 뙤약볕이 쏟아지는 풍경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허물어진 담에도 망가진 창살 너머 툇마루까지 긴 풀들이 점령한 지 오래고 허물어진 담에도 움푹 내려앉은 초가지붕 위에도 망초류가 뚫고 자란다. 쇠락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무심하게 핀 작은 꽃들. 떠나버린 옛 주인을 기다리는 걸까.


 어린 시절, 밭에 다녀오다가 버려진 초가집 근처를 지날 때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묻혀 있는 것만 같아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가난한 젊은 부부가 어렵게 얻은 아기를 잃고 미쳐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다 남편마저 목숨을 놓아버린 이야기 같은. 아기 웃음소리가 개망초꽃이 그득한 마당에 들리는 것만 같아 돌담 허물어진 곳을 지나지 못해 물끄러미 보곤 했다.


 풀을 사랑한 시인은 개망초를 이렇게 노래한다.

           

묵밭에는 쑥구기가 울었다.

화전민이 떠나고

개망초 꽃들이 꾸역꾸역 피었다.

일 원짜리 백동전만 한

개망초 꽃들이 떼 지어 모인 곳엔

개망초꽃 향기가

산맥의 구름보다 일렁거렸다.

쓸쓸히 떠돌아간 것이

유월 장마 같기도 하고

죄 없는 혼백 같기도 하여서….       *양채영, <개망초>    

      

 누군가 떠난 자리. 유월 따가운 햇살아래 피어난 개망초 꽃을 볼 때마다 허물어진 집 마당에 피어난 주인의 혼백 같아 마음이 아린다.   

  



 올해도 산과 들에 무심히 피어나 무서울 정도로 자라난다. 신경 쓰지 않으면 밭에는 하루 이틀 사이에 온갖 잡풀이 메워진다. 방심한 틈에 곧 정글처럼 변한다. 잡풀 중에 가장 힘센 풀이 망초류가 아닐까. 농사짓던 밭도 얼마간 돌보지 않으면 개망초가 점령하여 본래부터 못쓰던 땅처럼 되고 만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는 개망초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주인공 춘희는 서명을 할 줄 모른다. 대신 근사한 서명을 한다. 벽돌 공장에 무더기로 핀 개망초꽃을 이름 대신 그려 넣는다. 조그맣게 꽃잎을 그려 넣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명. 그녀는 개망초가 천상의 꽃이란 것을 알았던 걸까.  


 잡초라는 이름으로 천대받으며 뽑아 밭담에 던져버린 그 풀이름에는 천상의 풀, 천상의 꽃이라는 숭고한 의미가 들어 있다. 천상쿨, 천상의 꽃. 그렇게 불러준 제주인의 마음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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