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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찬 Jun 28. 2024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다

건강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들 

“지금까지 잘 버텨내셨네요. 그런데 이제는 몸이 더 이상은 어렵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증상들은 상관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줄기에 매달린 고구마처럼 하나로 꿰어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하나를 잡으면 다른 곳에서 다른 증상이 튀어나와요. 그걸 일일이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몸도 마음도 황폐해지고 맙니다. 이제까지의 치료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흐름을 바꾸지는 못한 것 같아요. 앞으로는 두더지가 나오는 패턴을 이해하고, 게임기의 전원을 끌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죠.”   

상담하고 환자의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주 자신이 가진 장점이나 개성을 죽이고, 사회나 다른 사람이 정해준 틀에 자신을 애써 맞추고 참고 지내 온 환자를 만난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생길 것이 걱정되어서, 때로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게 되어 그렇게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맞춰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키지 마련이고, 이것이 적절하게 풀어지지 않고 쌓이면 다양한 병이 된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를 치료할 때는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환자가 하는 말과 몸이 보여주는 신호들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 때문에 병이 났다니!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 아니더라도, 환자가 보이는 일차적인 반응은 ‘부정’인 경우가 많다. 가끔은 낮고 깊은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시간을 갖고 증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면, 수긍하고 조금씩 노력하면서 치료하는 환자도 있지만, 때론 의심과 경계를 드러내며 다음에 내원하지 않는 분도 있다. 그러고 몇 해가 지나 다시 오면, 십중팔구 여전히 그 안에서 또 다른 병을 만든 것을 확인한다.    


병의 스위치와 시퀀스를 파악하면, 치료를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버티다 병이 난 경우는 먼저 신경계의 불균형으로 발생한 신체적 긴장을 풀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몸과 마음에 ‘괜찮아. 힘 빼도 돼, 안심해.’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편하게 호흡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다독이고 풀어서, 한껏 위로만 몰려 있던 압력을 풀어서 손끝 발끝까지 흘러가게 한다. 이렇게만 해도 많은 증상들이 호전된다.  

  

자신이 힘을 주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 과정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무의식적으로 없는 힘을 쥐어 짜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힘을 빼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힘을 덜어낸 후에는 그동안 소모된 것을 채우면서, 균형 잡힌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단계로 넘어간다. 치료와 함께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간단한 기법들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해서 일정 궤도에 오른 후에 헤어지면 좋은데, 보통은 불편했던 증상이 사라지면 치료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두꺼운 얼음이 얼어서 웬만한 충격에도 깨지지 않길 바라지만, 환자는 살얼음만 얼어도 다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산다.”, “너는 얼마나 다르냐.”라고 말을 듣는다. 나도 수긍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버텨가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혹시 특별한 몇 사람의 신화를 일반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왜 그렇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교육 때문에?,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라는 유전자의 명령?, 그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잃어버리고 병까지 나는데?’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오구라 기조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는 한국이란 나라의 도덕지향성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리理에 대한 지향성을 말한다. 돈이 양심이란 말이 유행하는 현실인데다가,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지만, 사회를 한 명의 환자로 치환해서 생각하면 일리 있는 진단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의 말처럼 도덕지향적이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처럼, 버티다가 병이 나는 것은 도리어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가 처형을 당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막연한 불안조차 감당할만한 힘이 없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비상식적이지만 확신에 차 있는 자들에게 사회 전체가 끌려다니고, 그들이 제시하고 만들어 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는 것은 아닐까 싶다.   


환자 중에도 몸의 뿌리가 되는 흐름의 힘이 약하고, 흐름이 전체적으로 위로 붕~ 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태가 되면 본인의 뜻(志)이 견고하지 못하게 되어,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에 끌려다니기 쉽다. 넓고 깊게 생각해서 자신의 뜻을 명확히 한 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혹 하거나 얕은 수준의 감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병이 날 수 밖에 없고, 무엇보다 나를 놓치고 잃어버리게 된다.    

‘존버’라는 말처럼 살다 보면 참고 견뎌야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왜 그리고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마냥 버티는 것은 인생과 건강 모두에서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존버’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략적이고 내 선택에 의한 적극적 행동일 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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