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도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
"모든 인생은 조개껍데기 같은 것에 갇혀 궁극적으로 무지와 무능 속에 흘러간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혼자 내린 확신 속에서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안내자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앞으로 돌진하는 가련한 눈먼 미치광이를 흉내 내는 것이다."
당신은 우연히 읽은 이 문장이 나오는 부분을 접어두었다. 당신은 당신이 그것을 왜 접었는지 당신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그 이유를 당신은 자신이 -오이디푸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확신과 명료함 만큼이나 무지하고 무능한 것인지 깨달았다는 데 찾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쓸려나가는 바닷물처럼 손자국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것은 명확한 감정이 되기 전에 사라지지만,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지금 시간의 대부분을 쏟고 있는 현재의 모든 사건이 사실은 무익하며 불필요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쩌지?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는 신념과 가치가 나의 삶과 행복을 단순히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면 어쩌지?
당장 내일이라도 사회가 변화해서 내가 쌓아올린 능력이 형편없이 무너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쩌지?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 별거 없는 이유로 관계를 이어나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인지한 순간 순식간에 대체되거나 내평겨진다면 어쩌지? 당신이 느낀 이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심취하는 동안,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하게 되는 파국을 맞게 되면 어쩌지?
젊고 능력 있는 오이디푸스마저 용기를 아버지를 살해한 잔혹함으로, 진실한 사랑을 어머니를 능욕한 욕망으로 추락했는데 직위도 재능도 없는 평범한 현대의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평생의 시간을 걸쳐 쌓아올린 나라는 성은 테베와 견주어 봐도 당신에게는 거대하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최소한 그 탑 안에 갇혀있던 '진짜 사람' 한 명은 죽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다른 안내자의 음성에 귀 기울어야 한다. 잘게 쪼개진 진실의 조각을 모으다 보면,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 마지막에 눈을 찌를 정도의 확신만큼은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당신은 평소라면 읽지 않을 이 책을 읽었다. 책의 이름은 <슬픔에 이름 붙이기>다.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의 사전', 아름다운 표지를 바라보며 당신은 깊은 마음속에서 이죽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당신이 감정을 정의하는데 헤매고 있듯이 다른 사람-당신을 치료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마저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확신과, 그것을 단어처럼 정의하여 꿰매고자 하는 시도에 깔린 인류의 병적인 오만함을 상상한 것이다.
감정이 뿌리내린 무의식이 영원히 완전히 의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형용사와 명사로 묶고, 하나의 단어로 나열해봐야 지식이 될 뿐 그 개인의 삶에서 대단한 지혜가 되지는 못한다. 정교하고 형이상학으로 변형된 지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웃고 교류하고, 자신의 혼란을 지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객관적 언어'라는 망령에 시달려왔는가. 거대하게는 문명의 비극으로, 미세하게는 번드르르 한 삶에 대한 불안으로 작용해왔다.
최소한, 당신에게는 그랬다. 제대로 먹고사는 일, 명확하게 사람들과 교류하고, 깔끔한 사고를 추구하는 것. 당신은 그 모든 것들에 괴로워했다. 당신은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처럼 '회의를 유지한 채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중간에서 부유하기를 선택했고, 그러한 부분에서 살에 찔리는 바늘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당신은 거친 상상력을 발휘한다. 사전에 나온 단어를 거드럭거리며 표현해놓고서는, 새로운 교양 지식처럼 남용되는 장면을 말이다. 타인과 자신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너무 갑갑한 상자에 끼워 넣는 역겨운 장면을 말이다.
당신은 자신의 망상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찌르고 있는 대상이 그 자신인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타인을 바라보지만, 타인을 영원히 초대하지 않으면 눈 먼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그 편집적인 망상에 잠기기보다는 읽기를 선택했다.
당신은 책을 읽은 다음 ,이 책이 당신에게 더이상 바늘로 작용하지 않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음 예민하게 반응했던 언어화는 감정을 박제시키는 것도 아니었으며, 너무나 세밀하고 작가의 주관성이 드러나 객관적인 판단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이 책은 사전의 형식만 따왔을 뿐, 작가의 에세이에 가까웠다. 애당초 책에서 소개하는 단어도 많은 비중으로 저자가 지식과 상상력을 곁들여 마음대로 만든 것이었다.
객관적 형식을 빌린 주관적 에세이. 당신은 갑자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감대를 느꼈다. 너무나 미세하고 주관적이어서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단어를 붙이는 것은, 그것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는 행위에 가까웠다. 작가의 입장은 사전이라는 형식에서 당신이 예견한 객관주의의 오만함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에 가까웠다. 가장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을 보호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러하길 바라는 마음은 덤이었다.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당신'을 지칭하여 바꾸어 표현하는 에세이에 포함된 삽화들은 당신이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건들과 비유로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외국인이며, 성별도 다르고, 아마 성향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미세한 장면을 포착한 글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사전처럼 딱 들어맞는 감정들이 있었다. 너무나 주관적인 글이 객관적인 규칙으로 배열되어, 에세이에서 나열하는 장면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낀 독자의 어느 부분을 정확히 찌르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당신은 이 책에서 느낀 감정을 그와 비슷한 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당신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 수많은 '가짜 정의'속에서 만족하지 못한 감정들을 약간 우습지만, 형식미를 갖추어 정의하고자 하는 마음에 반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래서 이 책에서 느낀 것을 '상호사전교환'이라고 지어본다. 상호주관주의에서 착안하고, 주관에 '사전'이라는 아이러니한 단어를 만든 다음 경험의 뉘앙스를 넣기 위해 '교환'을 추가한 것이다. 당신은 한국어의 규칙이 어렵다는 사실과 이름 짓는데 형편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그것이 정의되고 보호되며,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되지 않은 상태로 전달되었는데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