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몰타의 유대인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충실하게 원작을 재현한다. 시각적 요소와 재해석된 뉘앙스가 추가되었지만, 그때의 관객들이나 지금의 관객이나 다른 평가를 하지 않도록 구성했다는 뜻이다.
고전을 현대 극장에서 올리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몰타의 유대인'을 올리는 방법은 약간의 개작이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혐오의 희생자로서 유대인 바라바스를 변형하여 해석했다면, 당대 사람들의 해석과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많은 변형을 거치지 않고 내보냈다면 현대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보는 내내 연극 '스카팽'이 떠올랐다. '시각적인 면이나 인물에서 적절한 변형을 가하되, 작품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핵심적인 코드는 살리는' 방식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방식도 비슷하지만, 스카팽과 바라바스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바라바스'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는 유대인에 대한 악의적인 이미지의 결정체로 해석될 수 있으며, 기독교 사회의 탐욕과 폭력에 의한 피해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더 흥미롭게 느꼈던 것은, 바라바스가 앞서 내가 언급한 '스카팽'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조롱하는 유쾌한 인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상황을 전반적으로 설명해주는 해설자의 역할도 수행한다는 점이었다. 바라바스는 관객들을 향해 자신의 상황과 동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저주와 조롱을 잊지 않는다. 관객들은 바라바스의 악행에 치를 떨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조롱에 공감한다.
스카팽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바라바스가 일종의 기존 권력 체계에 대한 전복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도 비슷하다. 스카팽은 당시 천대받는 하인이었지만 너구리 같은 잔꾀로 자신의 주인을 매질하고 상황을 해결하는 해결사로서 대중에게 사랑받았지만, 자신을 짓누른 총독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바라바스는 대중들에게 호감의 대상이 아니었다.
스카팽은 돈에 집착하는 자신의 주인을 혼쭐내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바라바스와 대척점에 있고, 스카팽의 소심한 복수와 바라바스의 악행이 어디 어깨를 나란히 할까 싶긴 하지만, 전체적인 서사의 전개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은 두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지 않은가? 그리고 각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캐릭터의 차이가 '코미디'와 '블랙 코미디'를 가르는 것일 테다.
장르적인 면에서 '몰타의 유대인'은 블랙코미디를 표방한다.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 키치한 극장 디자인이 작품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돋보이게 한다. '우스운 고발'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장르에서, 우리는 연극이 꼬집고 있는 부분을 바라봐야지만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바라바스'라는 인물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에게는 탐욕스러운 기독교인, 이민자에 대한 가혹한 차별,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유대인의 배금주의 같은 것들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바라바스고, 여성이고 하얀 캐주얼 정장을 입은 현대의 '바라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르게 해석된다.
현대의 관점에서 '자본가' 바라바스는 좀 더 일반적이다. 고리대금업은 과거 멸시받는 업무였지만, 오늘날 자본을 굴리는 일은 노동 소득보다 더 지적이고 당연한 일로 자리 잡았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바라바스를, 과거의 관객들은 남의 고혈을 빨아먹는 행위를 내세운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는 존경할만한 수완을 가진 존재로 생각될 것이다.
이민자에게 가혹한 세금을 뜯는 몰타 총독의 행위에 반발하는 바라바스의 행동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노동소득이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고, 전쟁의 참상을 잘 이해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행하는 징수'는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은 그 어떤 것보다 동기가 되기 때문에, 총독의 차별적이고 가혹한 몰수에 초점을 두게 한다. 이에 따라 바라바스의 악행은 이전의 관객보다 어느 수준까지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대인 바라바스'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바뀌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대인'은 단 한 번도 차별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최소한 내가 한국에서 접한 문화에서 그들의 교육방식과 찬란한 부는 본받아야 할 것이었다. 일종의 상징적 기호로서 존재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실제 작용하는 '유대인' 역시 당시와 비교해 위세가 다르다. 한 편의 문화 콘텐츠에서 그들은 차별받는 민족으로 묘사되지만, 다른 한 편의 뉴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이르는 분쟁에서 강자의 위치에 서 있다.
이런 현대적인 관점이 끼어들면서, 작품의 감상은 좀 더 풍부해진다. 관객은 '변형되지 않은 과거'와 '재현된 현재'를 끝없이 비교하면서 작품을 감상한다. 과거와 현재의 간극에서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작품이 끝을 향해 전개될수록, 이런 사회 고발적 성격은 옅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바라바스의 악행은 상식을 넘어 환상적인 수준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과장되면서 초기의 사회 고발적 성격이 옅어지고 전차처럼 행진하는 정신없는 스토리의 쾌감에 몸을 맡기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라바스가 시체 속에서 몸을 일으킬 때는, 상징화된 바라바스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결말을 앞서 말한 고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실'보다 '콘텐츠'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러한 변형이 만족스럽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점점 더 현실적 인물보다는 어떤 철저한 악당으로 변모해가는 바라바스가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늘 일어나는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재밌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어떤 집단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사를 풍자하려고 했다면, 아주 적절한 연출이기도 했다. 작가의 의도는 홀로 살아남은 바라바스가 관객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겠지만, 그 부분 조차도 참으로, 문화예술의 의도하지 않은 음험한 행동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그래서 블랙 코미디 장르를 좋아한다. 작가의 의도마저도 어떤 것도 약간 삐딱한 태도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