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의 커리어 발전기
역사에 길이 남았던 사람들의 커리어는 어땠을까? 그들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역사적으로 성공했던 사람들과 실패했던 사람들의 커리어를 돌이켜보고, 그 분기마다 어떤 차이점이 존재했었는지 들여다보자. 왜 이 사람은 이러한 선택을 내렸고, 저 사람은 이러한 선택을 내렸으며, 그 선택들이 왜 성공과 실패로 나뉘어졌는지 들여다보면서 우리도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 첫번째는 카이사르이다.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더라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대해서 모르더라도, 그가 남긴 정책과 영향력에서 벗어나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카이사르가 남긴 그 결과물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먼저,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프랑스는 역사적 강국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카이사르는 프랑스를 정복하였고, 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움막에서 머물며 초보적인 농경생활을 지내고 있던 게르만족은 모두 로마의 문명에 복속되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고, 음악을 연주하며 말을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따뜻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로마의 생활 습관이 프랑스에도 적용되었다. 프랑스는 로마가 멸망한 이후 로마식 문명과 단결된 정치 체제를 유지하여 유럽의 패권국으로 역사를 지배하였으니, 카이사르가 만약 프랑스 정복에 실패했다면 유럽의 역사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두 번째로,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전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달랐을 확률이 높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때의 로마는 극심한 혼란기에 빠져 있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지역의 강자로 남아있을 것인지, 모든 유럽을 복속시켜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할 것인지가 정해지는 시기였다. 그 때 대다수의 로마 원로원(국회) 귀족들은 로마가 더 이상 팽창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계속 주도권을 잡고, 정치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대를 지닌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며 같은 원로원 의원들끼리 힘을 나눠가지는 상태가 그들이 바란 이상적인 공화정 체제였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여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300명 가량의 원로원 의원들이 의견 합일을 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매우 길었다. 이들은 국가 전략을 책임지는 전략기획실과 인재 풀로써 좋은 기능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국제 정세는 대기업과 같은 비대한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각지에서 로마의 적들이 군사적 도발을 행했으며, 보고되는 한정적 정보만을 바탕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 즉시 군대를 투입해야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적들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독재자를 처음부터 염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커리어의 중반에 접어들어 프랑스 정복을 시작할때 즈음 그는 단일 지도자의 형태를 띄게 된다.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는 원로원 의원들을 포섭하는 대신, 자신 곁에서 정복에 참여한 장군들을 원로원에 집어넣기 시작한다. 프랑스 정복을 진행하며 생겨난 백전불패의 병사들을 로마 원로원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동기부여와 인센티브를 제공하였고, 그들이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자신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도록 토목과 건축을 지시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킬 때 그를 강력하게 지지한 최대의 무기가 된다) 또한 프랑스 정복을 진행하며 그에게 협력한 부족에게는 무조건적 신뢰와 그에 상응하는 금품을, 대항한 부족에게는 부족의 파괴를 돌려주어 향후 적들이 항복할 수 있는 심리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얻은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로마제국을 통합한다.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정치체제로 바뀌게 된 로마는 원로원 지도체제에 비하여 훨씬 빠른 의사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는 자원과 역량을 가장 집중적이고 신속하게 활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의 로마 역사는 로마가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며 전 유럽이 하나의 문화를 영위하는 형태가 된다. 따라서 로마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유럽의 역사는 그리스-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12달 365일의 달력,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 건설, 복지증진 등 그가 남긴 유산들은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러한 능력을 갖추었고,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를 이해하여야 한다.
언급하였듯 이 시기 로마는 정치 체제의 혼란이 매우 컸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장과 소비자들이 대거 발생하였고, 이를 차지하려는 소규모의 기업들이 연합을 하여 시장을 지배하려는 상태였다. 이들은 각자도생을 위하여 한정적인 타겟층만을 위하는 서비스(정책)들을 제공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기업들의 연합이 담합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이 발생하는 시장과 소비자들을 타겟하기 위해선 대규모 투자(군대 파견, 전쟁)와 설비 확충(인프라 구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연합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투자를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시장과 소비자들은 기존에 그들이 향유하던 서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이사르가 태어났다. 귀족 가문 출신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은 부를 막대하게 소유하지 못했다. 관직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카이사르는 평범하게 취직을 한다. 로마의 사제(그 당시 사제는 행정직에 가깝다)에 선출되어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 카이사르는 굵직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의 첫 번째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난다. 독재자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이 시기 로마 원로원을 이끌던 사람은 술라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적인 마리우스 휘하의 부하들과 가족들을 숙청하고 있었는데, 이 숙청 명단에 카이사르가 등재되었다. 그러나 19세에 불과하고 뚜렷한 업적도 없던 카이사르는 숙청의 강도가 강하진 않았고, 그는 아내와 이혼하면 피해는 없다는 명령을 받았다. 숙청 대상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술라의 명을 따랐던 것고 반대로, 카이사르는 여기서 명령을 거부한다. 귀족 가문이었기에 큰 피해는 없을것이라는 생각, 자신은 중요한 숙청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술라가 이러한 일까지 간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의 결과였다. (로마에서 도망쳐도 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도망치고도 성공한 선례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 술라는 강경하게 그의 재산과 관직을 박탈한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는 암살자들을 보내는데, 카이사르는 어쩔수 없이 도주 생활을 시작한다. 친구와 협력자들의 집에 도망다니는 생활을 하던 중에도 사면을 요청하였고, 그가 중요한 직책은 아니라는 점과 귀족 가문의 도움 등의 이유로 사면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사제직을 포기한다. 사제직은 행정의 업무를 수행하지만, 국가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성과도 올릴 수 없는 자리였다. 도망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비전을 안정적 생활로부터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비전이 바뀐 이유는 도망생활에서 느낀 사제직의 한계(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단과 결과물이 없음)와 술라의 권력 등이 있었다.
사제직을 포기한 카이사르가 선택한 곳은 군대였다. 그 당시의 로마 군대는 로마의 사업 확장 전략을 수립하고, 실제로 시행하는 실무 중심의 조직이었다. 로마 군대가 가진 조직의 메리트는 전체 조직 내에서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 실적 위주로 승진이 이루어지는 점,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소구된 카이사르는 3년동안 술라를 피하여 군대에 복무하는데, 여기서도 아직 뚜렷한 공적을 올리지는 않았다. 근무지가 전쟁이 속출하는 지역이 아니었고, 하급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전술을 입안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에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하며 이후 커리어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한듯 하다. 왜냐하면 군복무 3년 이후 그는 변호사로 근무하기 시작하는데, 짧은 시간에 완성되지 못하는 논쟁술과 변론의 역량이 뛰어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변호사 이전부터 수사학적 준비를 장기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커리어에 성공가도가 열리게 된다. 로마 시대의 변호사들은 현대의 논객에 좀 더 가까운데, 카이사르는 정치와 각종 정책들에 관하여 대중들에게 지지받는 발언을 많이 하기 시작하였다. 현대로 치면 프리랜서 논객으로 활동하며, SNS에 경영전략에 관한 논설을 배포하였고 그 가치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가 로마 동부(오늘날의 터키)에 이민족이 침략하였을때 자비를 들여 소규모 기동대를 꾸렸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로마 인민들에게 지지를 얻게 되었다.
사실 이때부터 카이사르의 커리어 초반은 순탄하게만 흘러간다. 여러 선출직에 당선이 되며 동년배들 중 가장 앞서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굵직한 실적을 올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선출직에 당선되기 위한 지지기반은 얼추 확보하였으나, 전국적인 커리어로 발돋움하기 위한 실적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자나가 이십대의 혈기왕성한 카이사르는, 유망한 정치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언가 아쉬운 커리어를 가진 채로 38세가 된다. 그리고 38세가 된 카이사르는 두 번째 인생을 바꾸는 일을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군사적 실적에서의 터닝 포인트였다.
역:사적인 경영전략 (1.2) - 카이사르 : '틀에서 벗어난 풍운아의 전략'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