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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 Sep 24. 2019

오래된 것을 좋아하세요? (1)

100년 된 영화관에서 60년대 프랑스 영화 보기

1913년에 멜버른에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1935년, 부지를 사들인 O'Collins는 유명건축가를 통해 아르데코 양식의 극장을 짓고, Astor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유행하던 기하학적인 무늬의 카펫을 깔고 고급스러운 소파들로 복도를 채웠다. 세련된 극장에는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이 있었다. 자그마치 2층 규모의 스크린은 극장을 가득 채운 1, 2층의 의자들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79년이 흐르면서 극장은 스크린을 하나만 가진 유일한 극장이라는,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꺾고 감탄에 차 바라보았을 다섯 개의 별 조명은 두 개가 나가 있었고, 그게 얼마나 오래 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신사들이 양산을 받쳐든 숙녀들의 장갑 낀 손을 에스코트하며 들어섰을 극장의 정문에는 이제 부랑자들이 기대서서 가끔씩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토 극장의 외관 @까만


아직 시작 안 한 것 같은데?

나는 패트에게 속삭였다. 패트는 묵직한 문을 열어 컴컴한 실내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황량하게 보일 정도로 넓은 홀이 펼쳐졌다. 바닥에는 조악한 무늬의 오렌지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팔걸이가 넓은 오래된 소파들이 군데군데 버려진 듯이 놓여 있었다.

숨어 있었던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던 젋은 여자가 불현듯 인사를 걸어오면서 시야에 들어왔다. 여자는 카펫과 같은 무늬의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는 간호사의 것처럼 커다랬다.

영화 시작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아 있었고, 아직 표를 팔 수가 없다고 여자는 말했다.

매진되거나 하진 않겠죠?

패트의 질문에 여자는 웃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우리는 괜히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화관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내가 물었다. 여자는 아마도 그럴 거라고 했다.

언제까지 운영을 하죠?

내년 4월까지요.

아마도, 라는 말과는 달리 이미 확실하게 결정이 난 듯 했다.


주변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극장은 꽤 북적거렸다. 우리는 줄까지 서서 표를 샀다. 영화 두 개를 연달아 상영하는 동시상영이었고, 보통 영화관의 티켓 하나 값에도 못 미치는 15불이었다. 우리는 표를 들고 2층으로 올라섰다.


2층에는 오래된 영사기가 전시되고 있는 건지 버려진 건지 모르겠는 형태로 놓여 있었다. 구석에는 더 이상 꺼내 놓지는 못해도 버리기는 아까운지 모형 야자수들이 반쯤 숨겨져 있었다. 패트는 여러 소파에 앉아 보았다. 나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화려한 고급 카펫이 더할 나위없이 조악하다는 것에 놀라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극장이 세워진 아르데코의 시대에 그려진 것이 분명한 재즈를 추는 남녀의 벽화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아스토 극장의 2층에 앉아 영화 상영 시작을 기다리고 있으면 100년 전 아르데코 시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까만


우리는 와인과 당근케이크를 사서 상영관에 들어섰다.


스크린은 정말 거대했다.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천장은 엄청나게 높았다. 우리는 각기 1967년과 1977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를 보았다. 1967년의 여자는 가슴을 보일 수 없었는데, 1977년의 여자는 가슴을 보일 수 있었다. 1967년의 여자는 토마토 케첩 색의 피를 흘렸고, 1977년의 남자는 고무처럼 휘는 곤봉에 맞아 기절을 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영화의 색깔도, 빛나고 아름답던 극장도.

아름다움이란 그런 거 아닐까.

영원할 것 같지만 변하고 마는 것.

결국 빛바래고 벗겨져 버리는 것.

끝내 조악하고 초라해져 버리는 것.


아스토 극장의 화려한 2층 @까만


이제 극장은 호텔 혹은 식당, 빈티지한 느낌의 나이트 클럽으로 모습을 바꿀 것이다. 조악한 것들이 복고라는 이름을 달고 세련되게 둔갑할 것이다. 우리는 극장을 빠져나오다 다시 Astor를 돌아보았다.

시대에서 한참 떨어져나온, 이미 사라져버린 아름다움의 부끄러운 증거처럼 Astor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패트의 팔짱을 꼈다. 나와 패트는 극장이 문을 닫기 전까지 자주 오자고 약속을 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아스토 극장의 상영 일정표 @까만



*

다행히도 아스토 극장은 아직 그 자리에 있어요.

Palace Cinemas가 극장을 인수하여 앞으로도 영화상영을 이어나가겠다고 발표했고, 

오늘 날짜의 상영 일정도 확인이 되네요.

오래된 것을 지켜나가려는 호주 사람들의 이야기는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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