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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쵸비 Jun 11. 2023

#10. 세종대왕의 독특한 공부법_01

*세종대왕은 어떻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까?




   1960년 8월15일 한국은행은 새 화폐 <개 천환권>을 발행한다. 도안 인물로 기존 이승만 대통령 대신 세종대왕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고, 한자 사용 없이 순수 한글과 영어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후 세종대왕은 오백환권, 1백원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1만원권에 얼굴이 실렸다. 화폐는 그 나라의 얼굴이다. 화폐 도안에는 인물초상이 주로 쓰이는데 그 이유는 다른 소재에 비해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장 압축적이고 쉽게 대내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사용된 인물의 위엄과 훌륭한 업적이 화폐의 품위와 신뢰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화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다. 화폐 역사의 슈퍼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화폐 인물로 장기 집권한 데엔 그 이유가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을 선택할 때는 여러 검증 절차를 거친다. 우선 논란의 소지가 없어야 하므로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역사적 검증을 충분히 거친 인물을 선정한다. 또한, 뛰어난 업적과 품성으로 많은 국민이 존경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종대왕은 아주 훌륭한 모델이다. 

   


   우리 역사에는 많은 군주와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어떤 군주는 위대한 업적을 세워 존경받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지탄을 받는 군주와 지도자도 많다. 백성들에게 훌륭한 품성으로 존경받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종대왕도 어린 시절부터 좋은 성품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걸핏하면 고자질을 하고 잘난 체도 많이 했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은 싫어해서 병약했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자로도 알려져 있으나 형들에게 느낀 경쟁의식은 만만찮았다.      

   

   대표적인 일화로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왜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슬쩍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왕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마음을 바로 잡은 뒤 몸을 꾸미라'는 충고를 함으로써 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도 했다. 가정환경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 냄새를 맡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 속에서 자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종대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이 처음부터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세종대왕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랐다. 큰형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왕세자의 덕목을 쌓기보다는 반항과 일탈을 일삼았다. 전국의 기생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파티를 하기도 했다. 대로한 태종은 기생들을 곤장으로 때려 내쫓고 양녕대군을 크게 꾸짖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행으로 결국은 세자에서 폐위된다. 둘째 형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해 있어서 세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형들과 달리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모르는 내용이라도 백 번을 읽으면 마침내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역사, 철학, 의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읽어 지식을 쌓았다. 마침내 태종은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고 2달 후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양위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창조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대 모든 분야, 즉, 농학, 문학, 사학, 언어학, 음악, 법학, 수학, 과학, 공학, 철학, 경제학, 재무학, 회계학, 천문학, 물리학은 물론 군사적인 측면과 인권에도 신경 쓴 임금이었다. 간단히 요약해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평가로는 조선은 사실상 세종대왕 집권 대에 다 만들어졌고, 이후 수백 년간 그 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씩 보수만 하면서 흘러갔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분야별로 대표적인 세종대왕의 업적, 즉, 성과를 정리해보면,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 농업, 지리, 측량, 수학, 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 조세, 재정, 형법, 군수, 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과학기술과 예술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뒷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이러한 수많은 업적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다음 이야기 2편에서 계속됩니다.>

 






<*이미지 출처: 구글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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