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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쵸비 Jun 18. 2023

#10. 세종대왕의 독특한 공부법_02

*세종대왕은 어떻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까?




   당시 세종대왕의 상황을 3가지로 재조명 해보면,

첫째, 학습력이 강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고 탐구 정신이 강해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덕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책을 읽었다. 세종대왕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임금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위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임금에 올랐기 때문에 늘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물어보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같은 ‘세종대왕의 공부법’을 요약하면 ‘질문하고 토론하라’이다. 1만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세종실록’에서 임금의 표현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이다.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생각을 이끌어 내고 토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방식이다.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질문인 “마따호셰프?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요?)"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며 경청하는 스타일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같은 세종대왕의 공부법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 사회에도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의 공부법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둘째, 공감력이 뛰어났다. 세종대왕은 윤대(輪對), 즉 인터뷰 시간을 자주 가졌다. 영의정, 좌의정 같은 고위층이 아니라 말단 신하들과 돌아가면서 1대1 심층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도 했다. 이때 특이한 것은 나이든 관료와 집현전의 젊은 학자를 동시에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젊은 학자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종대왕은 지위 고하, 노소 구분 없이 문제해결 팀을 구성해 문제를 찾고 백성의 삶에 공감하기 위해 관찰, 인터뷰, 간접 체험을 많이 한 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 창제 결정이다. 고위층, 기득권자들은 우리글에 대한 필요와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성의 불편과 필요를 헤아렸고, 그로 인한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다.      

  

   셋째, 조선 최고의 창의력 왕이었다. 조직이 변하려면 구성원이 달라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세종대왕은 신하들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잘 이끌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항상 찬성팀, 반대팀, 중립팀으로 나눠 장시간 논쟁시키고 경청하며 관찰했다. 장영실, 황희, 맹사성, 정인지 등의 인재에게는 집현전 같은 장소에서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줬다. 집현전은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교류하며 매일 오후 왕(리더)과 함께 아이디어를 모으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창의력 스쿨 역할을 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은 세종대왕이 혼자 이뤄낸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이라도, 천재라도 나라의 모든 일을 혼자서 꾸려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빛나는 업적 뒤에는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신하들이 있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능력만으로 인재를 등용했다. 세종대왕의 시대에는 명재상 황희를 비롯해 과학의 장영실이 있었고 음악에는 박연, 북방 개척에는 김종서가 있었으며 문학에는 변계량, 정인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세종의 브레인인 집현전의 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세종대왕에게 운이 좋게도 다른 시대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인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시대는 하늘이 내려준 행운의 결과였을까?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셋째 자식이었던 그가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정권 다툼에서 승리했고, 큰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행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별다른 후계자 교육도 받지 못했고, 인턴(세자)이 된 지 2개월 만에 조선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준비된 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은, 세종대왕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발탁하여 Learning 해주고, 정책 수립과 프로젝트를 통해 Career 개발, 인재들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Coaching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이 가능했을 것이다.  <끝>

[참고문헌]/ 세종대왕의 책읽기(2015.04). 국제신문 일부 내용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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