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운지 두 달쯤 된 시점이었다. 동요나 가요, 뉴에이지를 쉽게 편곡한 곡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슬슬 실력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드니 오리지널 클래식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린 곡은 좀 할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에 몇 곡 시도해보았다가 처참한 쓴 맛을 보고 함부로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확이라면 느린 곡이라고 결코 쉽지 않다는 고수들의 조언에 수긍할만한 경험치를 쌓았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때보다는 좀 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요즘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얼마전에 베토벤 비창 2악장(루이스 터커의 'midnight blue'의 오리지널로 잘 알려진)을 연습해보았는데, CD나 유튜브에서 접하는 거장들의 연주는 멜로디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들리고 나머지 반주가 그 멜로디를 잔잔하게 깔아주지만, 이 곡에도 함정이 있다. 오른 손이 따로 논다. 엄지와 검지로 분산화음을 연주하고(이걸 내성이라 부른다) 나머지 손가락으로 멜로디를 연주해야 한다. 내성은 작아야 하고 멜로디는 돋보여야 한다. 그 와중에 왼손으로는 화음을 눌러야 한다. 즉 내게 쓴 맛을 보여주었던 바흐의 '예수, 인류 기쁨의 근원'과 비슷한 구조의 곡이라는 뜻이다. 오른 손 힘조절을 제대로 못하고 내성과 멜로디에 동등한 힘을 분배하면 나처럼 된다. --; '뚱땅뚱땅 뚱땅뚱땅 뚱땅뚱땅 뚱땅뚱땅' 잔잔하고 아름답기는 커녕 어설픈 행진곡으로 변모한다. 쇼팽의 에튀드 10-4 '이별', '빗방울 전주곡'도 같은 구조이다. 빠른 곡을 속도를 내지 못해 느리게 연습하는 것은 그나마 들어줄 수라도 있는데, 이런 곡이 뚱땅 행진곡이 되어 버리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위대한 음악가들을 능욕하는 행위를 하는 것 같아 피아노에서 손을 내려놓게 된다. '빠른곡 = 어려운 곡, 느린 곡 = 쉬운 곡'이라는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가를 여실히 깨닫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바흐의 평균율 클래비어 1곡 1번 프랠류드를 연습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생각보다 쉬울 것이고, 그러면서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명곡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Rqml9MGDHE
사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나는 바흐의 평균율 클래비어를 고등학생 때 처음 들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 CD를 구입하고 들었을 때 가장 처음 접했던 곡이다. 특정한 멜로디 없이 분산화음만이 빠르게 순차적으로 하강하는 형태의 곡이지만 그 어떤 멜로디에 비해도 뒤쳐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9세기 프랑스의 작곡가 구노는 이 곡을 그대로 반주로 차용하고 거기에 멜로디와 가사를 얹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구노의 '아베 마리아'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나는 이 빠른 곡을 이렇게 쉽게 쳐내는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얼마나 위대한 피아니스트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쉬지않고 흐르는 16분 음표의 향연. 그런데 이 곡을 내가 칠 수 있다고? 농담이겠지? 아니면 장난이거나, 이를테면 나만 먹기는 억울하니 너도 한 번 엿 먹어봐라하고 네이버 영화 추천에 감상평을 올리는 '클레멘타인'이나 '제 7광구' 찬양론자들처럼...
며칠 망설이다가 학원에서 악보 찾기 검색을 통해 악보를 복사했다. 그리고 이 곡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었다.나는 이 곡이 왼손으로 화음을 연주하고 오른손이 쉬지 않고 '도 -> 미 -> 솔 -> 도 -> 미 <- 솔 -> 도 -> 미'를 빠르게 연주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왼손으로 '도 -> 미'를 치고 오른손은 '솔도미 - 솔도미'를 두 번 반복하는 패턴이었다. 오른 손이 부지런히 왔다갔다할 필요 없이 건반의 일정한 위치에 올려놓고 아래에서 위로 두 번씩 반복하기만 하면 되는 형태이다.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다장조, 중간 중간 샵이나 플랫이 붙어 검은 건반을 눌러야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하얀 건반만 눌러주면 된다.
일주일간 꼬박 연습해서 레슨 시간에 선생님 앞에서 악보를 펼쳤다. 이 곡 좀 지도해 주세요. 선생님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도 잇지 못했다. 세상에, 다른 분들은 두 달 배워서는 이곡 쳐보라고 해도 악보도 제대로 못 읽는데... 우쭐해지는 느낌이었다. 음... 그렇다면 나는 신동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아이는 아니니 '신동안'이라고나 할까? 이런저런 착각에 빠져 있는 동안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본인이 선택하신 곡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음악 만들기에 들어갑니다. 빼도박도 못하십니다." 이것이 행복 끝, 고생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 순간까지는 미처 몰랐다.
이전까지 선생님은 좌우명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가 아닐까 여겨질정도로 칭찬을 많이 해주시던 분이었다. 도레미파솔 다섯 음 범위에서 왔다갔다 하는 동요만 연습할 때에도 '엄청나게 늘었다. 진보가 빠르다' 같은 칭찬을 해서 낯간지럽게 하시던 분이 이때부터 갑자기 스파르타 조교로 변모했다. 붓점 연습(다다다다다다다다 이런 식의 16분 음표 진행에 리듬을 바꿔 '따아다따아다따아다따아다' 내지는 '따다아따다아따다아따다아'로 연습하는 방식, 오리지널로 연습하기도 힘든데 왜 리듬까지 바꿔서... --;), 스타카토 연습(모든 음을 스타카토로 바꿔서 연습하는 방식, 이걸 하게 되면 확실히 그다음부터 원곡 연주가 수월하기는 하다. 그러나 스타카토 연습 자체는 엄청 힘들다.)을 과제로 내주었다. 게다가 음악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독설가들인지는 이때 처음 알았다. 내가 미스터치를 하면 곧바로 말한다. "방금 작곡하셨어요." --; 틀린 거 저도 알거든요. 말 안 해도 충분히 스=ㅜ치스러운데 '작곡'이라니...
게다가 이때까지 나는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누르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칠 때는 그게 이상한지 모르는데 선생님이 시범삼아 보여주는 눌러서 치는 것과 가볍게 치는 것의 차이를 직접 들으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차이를 설명해주면서 선생님은 내 소리에 대해 '둔하다, 탁하다, 무겁다' 등등, 가만히 있으면 국어사전에 등재된 안 좋은 뉘앙스의 형용사를 총동원할 기세이다. 제발 좀 그만 하시라고 하소연하기 전까지 온갖 소리를 다 들었다. --;
이 누르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곧바로 건반을 눌러대니 급기야 극약처방을 내리신다. 모든 건반을 치는 순간 손가락을 휙 띄우라고. 그러던 차에 선생님이 개인 사정이 생겨 학원을 그만두고 다음 선생님의 레슨을 받게 되었다. 그 선생님 앞에서 그런 방식으로 치자 이번에는 '왜 그렇게 치세요?'하고 묻는다. --;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의식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쳐보라고 말한다. 그러더니만 이제 누르는 습관은 많이 고쳐진 것 같으니 그냥 자연스럽게 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얼마 후 이제 굳이 레슨할 필요 없으니 알아서 틈틈이 연습하라는 인정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바흐의 평균율 클래비어 1권 프랠류드 1번 다장조는 나의 첫 번째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성과에 들떠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에 도전했다가 개피를 보게 됐는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아무튼 처음 이 곡에 도전한지 7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다른 곡은 몰라도 이곡만큼은 이틀에 한 번 정도는 항상 연습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실수 투성이이다. 미스터치 안 하는 것에 중점을 두다보면 곡의 다이내믹(강약)이 흐리멍텅해지고, 다이내믹을 신경쓰다보면 템포가 느려지고 미스터치가 발생한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완벽이라 한다면 90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연주는 아직까지 한 번도 못해보았다. 이 '쉬운' 곡이 이 정도이니 다른 곡들을 생각하면...
얼마전에 학원에 새로운 상담실장이 들어왔다. 학원 최연장자가(--;) 매일 연습 하러 오는 것이 기특해보였는지 한 곡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역시 이럴 때 그나마 자신 있게 칠 수 있는 곡은 이곡뿐이다. 끝까지 듣고나자 '연습 많이 하셨네요'라고 한 마디 하더니,' 그런데 왜 패달을 밟느냐, 바흐 곡은 패달을 밟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흐는 논레가토(음들이 끊어지는 느낌)로 연주해야 한다. 레가토(부드럽게 연결되는 느낌)로 연주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패달 밟는 것은 선생님이 패달 연습 때문에 하라고 한 것이고, 내가 연습한 악보에 분명히 레가토로 연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라고 답하자 학원 악보를 검색해본다. 그러더니 '아, 누구(이름 잊어버렸다) 판인가 보네.'하더니 바흐에 대한 두 부류의 해석자들에 대해 알려준다.
바흐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피아노가 없었다. 당시의 하프시코드는 어떻게 때리든 항상 같은 음량의 같은 소리만 낼 뿐이어서 악보에 p, f와 같은 셈여림 기호가 존재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당연히 바흐의 원래 악보에는 모든 악상 기호가 없고 음표만 나열되어 있다. 전자악기로 연주하는 대중가요 악보에 셈여림 기호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태 그대로를 연주해야 한다는 파와, 바흐가 오늘날의 발전된 피아노를 접했다면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연주했을 것이다라며 악보에 셈여림이나 레가토를 추가한 일종의 편곡본을 옹호하는 파, 나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실장님은 전자를 지지하는 입장인 것 같다.
아무튼 실장님의 조언대로 패달도 밟지 않고 셈여림 신경쓰지 않고 연주해보았다. 일단 미스터치는 적지만 듣기에는 음악적 요소를 덧붙인 것만 못하다. 그래서 원래 연습하던 대로 연습 중이다.
나에게 첫 번째 연주 레퍼토리라는 감동을 주었던 바흐의 평균율 클래비어 1권 1번 프랠류드는 이렇게 아직도 나에게 끊임없는 고민과 연습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아직도 생명력을 지닌 명곡이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