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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공 Aug 25. 2018

명곡들에 배신을 당하다

피아노 학원에 처음 등록하고 삼일 쯤 지난 뒤였다. 학원은 레슨이 주1회, 나머지 날에는 낮 열두 시부터 저녁 열한 시까지 아무 때나 연습실에서 개인연습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본인이 레슨을 더 받고 싶으면 주2회도 가능하고 매일 레슨도 가능하지만 비용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그냥 주1회 레슨이 무난하다. 레슨 시간에는 선생님이 기본적인 이론을 알려주고 과제곡을 내주면서 자세와 잘 못 치는 부분을 교정해준다. 첫 레슨 때 받은 과제곡은 매우 쉬운 선율의 연습곡과 동요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 손에서 피아노 음이 만들어진다는 것만 해도 신기했지만 한 삼일쯤 지나니까 매일 도레미파솔 범위내에서만 선율이 움직이는 동요만 치기가 조금 지루해졌다. 애초에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마음 먹은 것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내 손으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으니, 본격적으로 한 번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처음 택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ljq4MwzAbo


아시는 분은 다 아는 명곡이지만 모르는 분을 위해 소개하자면 소나타 32번은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로 웅장하고 빠른 1악장과 아름답고 잔잔한 2악장으로 구성된 곡이다. 피아노 소나타는 통상 3악장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당시 베토벤이 악보를 출판하려 하자 출판사 측에서는 왜 3악장이 없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이 곡은 2악장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했음에도 출판사 측이 계속 3악장을 요구해서 베토벤을 분노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곡의 기술적 요소가 당대 피아니스트들 수준보다 월등히 난해해서 근 30년간 연주 불가 판정을 받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다가 19세기 중반 안톤 루빈스타인이 대중 앞에서 연주한 이래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피아노 배운지 3일 밖에 안 된 햇병아리 입장에서 1악장은 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 빠르고 복잡한 곡이다. 2악장도 뒷부분은 만만치 않은 스피드로 접어들지만 앞부분은 아다지오 템포의 느린 진행인데다가 가장 기본적인 다장조이기 때문에 앞 부분만이라도 한 번 도전해볼만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첫음을 내는 순간 깊은 감동이 밀려 왔다. CD나 유튜브로 들을 때와 내가 직접 소리를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첫음은 간단하다. 오른손은 높은 음자리표의 미와 높은 도를 누르고, 왼손은 낮은 음자리표 상의 낮은 솔과 한 옥타브 낮은 도를 누른다. 우리가 음악 시간에 접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미솔 화음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순서를 세 옥타브로 나눠 도-솔-미-도로 변화를 주자 흔한 도-미-솔-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잔잔한 아름다운 울림이 들려왔다. 화음의 효과가 신기하기도 했고, 귀도 잘 안 들렸던 양반이 어떻게 이런 화음의 탐구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느리게 진행되는 선율에 베토벤은 끊임없는 화음의 변화를 시도했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화음을 바꿔주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느린 곡이니까 그럭저럭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이의 연주를 들을 때는 음들이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되는 느낌이지만 내가 칠 때는 손가락이 바뀔 때마다 음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페달을 밟아보아도 지저분한 울림만 들릴 뿐 그런 부드러운 진행의 효과는 나지 않았다. 하긴, 세계 최고 수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의 느낌을 이제 갓 일주일 배운 내가 따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냥 음표만 따라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이 곡도 중반이 되면 내림마장조로 조바꿈이 있어서 검은 건반을 눌러야 하고, 아다지오 템포는 그대로이지만 32분 음표로 잘게 쪼개지는 탓에 꽤나 빠르게 곡을 진행해야 하는 부분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이를 수 있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연습을 하는데, 뜻밖에 고비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다가왔다. 잔잔한 주제의 제시가 끝나고 첫 번째 변주가 들어가는 부분, 오른 손으로는 따아다라는 리듬으로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따다아라는 엇박을 연주해야 한다. 그냥 들을 때에는 따다다따다다 이런 단순한 리듬이었는데 막상 치려니 오른손과 왼손의 박자가 따로 논다. 오른손 따로 연습하고 왼손 따로 연습을 해봤지만 합치는 순간 내 손가락은 불에 구운 오징어 다리마냥 요상스럽게 꼬이기 시작한다.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현재의 수준으로는 연주 불가능이다. 좀 더 리듬감이 능숙해져야한다.


하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베토벤 어르신을 만만하게 생각한 나의 잘못이지라고 자책하며, 그렇다면 내가 연주할 만한 곡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곡이 있었다. 바흐의 칸타타 147번 중 '예수, 인간의 소망 기쁨'. 


https://www.youtube.com/watch?v=uKq5IcBFyeQ


이 곡은 원래 교회의 예배를 위해 작곡한 칸타타로 관현악 반주의 합창곡이지만 마이라 헤스라는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을 했다. 어린 시절 처음 클래식에 눈뜰 무렵 라디오를 통해 마이라 헤스의 연주를 들으며 이래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구나 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래, 내가 좋아하는 곡 1순위에 항상 자리하는 곡이다. 오리지널 합창 버전도 좋지만, 처음에 피아노 연주로 들었던 탓인지 잔잔한 피아노 버전이 좀 더 마음에 든다. 학원 컴퓨터로 악보를 뽑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 샵이 두 개 붙었네. 이걸 무슨 장조라고 부르더라? 아무튼 주의해서 검은 건반 누를 자리 신경 쓰면 되지 뭐...으음... 그런데 이건 뭐냐?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주선율 아래에 이상스러운 콩나물 대가리들이 중간중간 삐죽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게 없으면 다섯 손가락으로 선율만 치면 되는데 그 이상스러운 콩나물 대가리를 함께 치려면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야 하고 주선율 연주를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만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선율의 진행과 일치하지도 않고 중간중간 엇박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매우 연주가 거북한 지경이었다. 어떻게 운지를 해야 하는지 아예 감이 안 왔다. 할 수 없이 상담실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건 손가락 번호가 어떻게 돼요?


한 마디 물어보았다가 정말 따귀 한 대 맞는 줄 알았다. 악보를 보자말자 실장님이 잉? 하는 고성을 지르더니, "지금 바흐를 연주하시겠다고요? 꿈도 꾸지 말고 과제곡이나 연습하세요." 약간 무안한 느낌이 들어서 웅얼거렸다. 


"과제곡 연습하면서 틈틈이 쳐보려고 그런건데..." 


"안 돼요. 바흐는 무리예요. 이걸 치느니 차라리 낭만파 작곡가들 작품 치는 게 훨씬 쉬워요 제가 애들 레슨할 때 애들이 바흐 친다고 그러면 저는 막 혼냈어요." 


지금도 혼내고 있잖아! --; 거의 말만 안 꺼냈을 뿐이지 기지도 못하는 게 날려고 한다는 분위기로 때릴듯이 위협하면서...


"이게 쇼팽보다 더 어렵다고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폭풍같은 스피드의 쇼팽 연습곡 '대양'이 떠올랐다. 언젠가 아득히 먼 훗날 치고 싶은 레파토리 1순위인데, 이 느리고 잔잔한 곡이 그것보다 더 어렵다고? "이곡 템포 느리잖아요."


실장님이 아예 연필로 악보에 표시를 하며 나에게 설명했다.


"빠르고 느린 문제가 아니예요. 이건 4성음악이예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각자 진행하는 곡이란 말이예요. 두 손으로 네 개의 선율을 다 따로 진행시켜야 해요. 전공자들도 바흐를 연주하려면 먼저 모여서 악보 분석부터 해요. 아예 각각의 선율을 다르게 색칠해서 연습하는 분들도 있어요. 낭만파 작곡가들 작품의 어려움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예요."


여전히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하긴 내가 보기에도 간간히 튀어나오는 콩나물 대가리, 즉 알토 선율을 신경쓰면서 주선율을 진행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두뇌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할 듯 싶었다. 게다가 왼손은 왼손대로 따로 노는 상황이니... 바흐, 이 아저씨, 자상한 아버지인줄만 알았더니 괴퍅한 양반이셨네. 뭐 이렇게 복잡하게 곡을 만들어서.


두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조금 의욕이 상실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떠올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6YaMNjNGCRQ

 

이거라면 혹시... 시몬스 침대 CF 배경음악으로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짐노페디는 단조로운 화음과 멜로디가 반복되는 우울하면서도 몽환적인 매력의 곡이다. 학원 컴퓨터로 악보 데이타 베이스를 뒤져보니 악보가 있었다. 다행히도 다장조였다. 아쉬운대로 짐노페디도 좋아하는 곡이니까 이거라도 하는 마음에 피아노 앞에 다가갔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곡과 내 손에서 나오는 소리의 느낌이 뭔가 다르다. 이건 내 연주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원곡의 우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나지 않고 뭔가 상큼발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원곡은 샵이 두 개 붙어 있는 구성이다. 무슨 장조라고 하더라? --; 내가 프린트한 것은 학원에서 초보자용으로 다장조로 편곡한 버전이었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검색해보니까 이 느린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매우 분주하게 왼손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왼손의 화음이 두 옥타브에서 따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듣기에 편하다는 것이 연주가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레슨 시간에 이런 소회를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만, 그럼요, 그래서 연주 포기하고 듣기만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라고 의기소침을 유발할 수 있는 답변을 하신다.


집에 가는 길에 상담실장님에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베토벤 월광 1악장도 어렵나요?" 실장님은 씩 웃으며 "어려워요."라고 잘라 말한다. 이 자식 질기네, 뭐 이런 느낌이 미소 속에 비쳐보이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리라. "그냥 악보대로 손가락 누르는 건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섬세한 손가락 터치가 안 되면 결코 분위기를 낼 수 없는 곡이예요." 수긍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머릿속에 남는 구절은 '악보대로 손가락 누르는 건 할 수 있겠죠.'라는 한마디 뿐이다. 막연히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명곡들에게 줄줄이 배신당한 느낌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쉽게 정복할 수 없으니 명곡이 아닐까 위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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