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아리엘 선생님('나는 오늘부터 피아노를 치기로 했다'의 저자 홍예나 선생님)의 블로그에 자주 방문에서 조언을 얻곤 한다. 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아리엘 선생님 블로그에 소개된 내 글을 읽고 왔을 테니 다들 아시겠지만, 혹시라도 다른 경로로 들어와 모르는 분을 위해 링크 걸어놓는다. 내 블로그에서는 뭐 재미는 좀 있겠지만 기술적으로 딱히 배울만한 것은 없다는 것 잘 알고 있다. --; 그러나 아리엘 선생님 블로그에는 기술적인 것 뿐만아니라 마음가짐, 음악에 대한 자세 등 배울만한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https://blog.naver.com/gilmoregirl
여기서 피아노 실력을 늘리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몇 가지 읽다가 날마다 다섯 손가락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곡을 연습하라는 내용을 접했다. 흔히 손가락 활성화를 위해 하농을 많이 연습하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바흐를 연습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음악적 완성도도 높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바흐의 평균율 클래비어 2권 6번 프랠류드를 추천하셨다.
다음날 악보를 뽑고 연습을 해보았는데... 으허허... 이거 도저히 내가 시도할 난이도가 아니다. 오른 손이 16분 음표 빠른 분산화음을 연주하는 동안 왼손은 8분음표를 스타카토로 쳐줘야 한다. 조금 더 진행이 되면 이번엔 반대 패턴으로 연주해야 한다. 확실히 연습 효과는 끝내줄 것 같다. --; 아리엘 선생님의 조언은 다 좋긴 하지만, 이분의 조언이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맹점이 있다. 이분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라고 소개하는 곡들은 내 입장에서는 초절기교나 다를 바가 없다. '쉽다'라고 못을 박은 곡이나 겨우 건드려볼 수 있는 수준이다. 할 수 없이 내 선생님께 연습 방법에 대한 조언을 청했다. 악보를 보시더니 '지금은 좀 무리인 것 같아요. 비슷한 진행인데 이보다 조금 쉬운 거 하나 소개시켜줄 테니 그거 연습하세요.' 그렇게 소개 받은 곡이 바흐 평균율 클래비어 1권 2번 프랠류드 c단조이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이전까지의 순정률에서 벗어나 평균율 체계를 확립했다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이 평균율 클래비어 곡집이다. 내 음악 이론 지식으로는 순정률과 평균율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려우니 링크를 걸어둔다. 가급적 제일 어려운 설명을 골랐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915&cid=58944&categoryId=58970
평균율과 순정률피타고라스의 조율법은 5도 및 완전4도의 비율인 3:2 및 4:3의 비율에 기초한 조율법으로, 다음 비율(또는 이런 비율의 역수)로 현의 길이를 조율한다. 이렇게 정수의 비, 즉, 유리수의 길이를 써서 조율하는 방법을 순정률(pure temperament)이라고 통칭한다.
평균율 클래비어 곡집은 한 편으로는 평균율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위해 제작된 일종의 연습곡 성격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1번 프랠류드를 쳤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수긍이 가는 바였다. 물론 간단한 구조의 프랠류드 다음에 푸가가 따라붙는다는 점이 의문이긴 했지만... 이 시대에는 일단 푸가부터 배우고 다른 기법 연습했는지 여전히 심각한 미스테리를 남기고 있다. 그런데 2번 프랠류드를 연습하자 또 다른 미스테리가 생겼다. 바흐 선생님, 아드님이 심하게 천재이셨나봐요. --; 어떻게 1번하고 2번 난이도 차이가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란 말입니까. --; 대체 몇 단계를 건너 뛴거여.이게 연습곡이라면 그야말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수준의 천재를 대상으로 만든 연습곡이다.
곡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 오른 손과 왼손이 16분음표 분산화음을 빠르게 연주하며 하강하는 패턴을 지닌 부분, 대략 전체의 4분의 3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2 - 왼손과 오른손이 나눠치기 주법으로 상승하는 부분, 여기서 템포가 아다지오로 바뀌며 약간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3 - 다시 힘을 모아 빠르게 연주하는 마지막 부분, 1구간과 비슷하게 양손 16분 음표 분산화음이 다시 등장하는데 템포는 심지어 프레스토이다.
어떤 것이 '연습 효과가 좋다'라는 표현은 따로 첨부하지 않아도 그 안에는 '빡세다'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가령 딴지일보에 '남자는 힘이다'라는 제목의 근육 운동법을 연재하고 책으로도 출간한 맛스타 드림이라는 분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 닥치고 스쿼트. 헬스장에서 자질구레하게 기구 가지고 쓰레기 세트 몇 시간 하느니 자신의 한계치까지 무게를 올려 스쿼트 몇 번 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는 의미이다. 공감하지만 시도는 안 했다. 훈련소에서 받았던 얼차려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열 명 정도 옆으로 서서 옆사람들과 어깨동무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였다. 한 세 번만 하면 허벅지에 느낌이 오고 다섯번부터는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여기에 점프까지 시키면 지옥이 따로 없다. 이걸 어깨에 역기를 짊어지고 수행하는 것이 스쿼트인데 미쳤냐, 그 고통을 또 맛보게? --; 차라리 근육 없이 사는 게 낫지. --; 군대에서는 비리비리한 훈련병들을 빠른 시간 안에 한 사람의 병사로 키워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스쿼트를 응용한 얼차려를 시킨다.
'하농보다 연습 효과가 좋다'는 말은 '하농보다 더 빡세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 곡은 정말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열 손가락을 혹사시킨다. 일정한 패턴의 손가락 움직임이 반복되는 하농과 달리, 5-2-1-2-1-2-1-2, 5-3-2-3-1-3-2-3, 5-4-3-4-1-4-3-4 등 온갖 다양한 패턴으로 손가락을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조성은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반반 정도 분포된 c단조. 정말 공평하게 흰 건반 쳤다 검은 건반 쳤다 해야 한다. 이걸 연습하다보니 평온하게 살아오던 손가락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갖가지 문제점을 야기하는데 일일이 다 적으려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나열해본다. 미스터치 정도는 생략한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섞인 곡이다 보니 손가락이 검은 건반 사이로 들어가야만 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손이 작은 사람들이 손 큰 사람들 부러워한다는데 적어도 이 곡은 손 작은 사람이 더 유리한 것 같다. 두꺼운 내 손가락이 검은 건반 사이를 부대끼며 흰 건반을 치다보니 일단 비좁고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고, 옆에 있는 검은 건반을 잘못해서 건드리는 상황이 계속 발생한다. 게다가 시와 도 사이, 미와 파 사이 흰 건반이 나란히 놓인 자리에 들어가 차례대로 두 음을 눌러야 할 때면 예전에 영등포 살 때 출근길 신도림역을 연상시키는 체증현상이 벌어진다. 손가락을 거의 붙이다시피해서 치려다보니 마찰이 일어나 담뱃불을 붙여도 될 지경이다.
손가락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한다. 처음에는 분명히 정위치에서 시작한 손가락들이 진격의 거인마냥 앞으로앞으로를 외치다가 나중에는 건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밀고 나간다. 그냥 놔두면 건반을 넘어가서 아예 피아노 현을 직접 때릴 기세이다. 알다시피 피아노 건반의 가장 깊숙한 부분은 왠만한 힘으로는 쳐서 소리 내기도 힘들다. 당연히 손에 불필요한 힘이 잔뜩 들어가게 된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계속 관찰해보다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손가락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위치에서 시작하지만 가운데 손가락으로 검은 건반을 치고 다른 손가락으로 연속해서 검은 건반을 쳐야하는 상황이 되면 길이가 짧은 손가락이 약간 전진하게 된다.다시 가운데 손가락으로 검은 건반을 치게 되면, 전체적으로 손이 약간 전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운데 손가락은 정위치보다 조금 윗부분을 치게 된다. 다음 손가락은 그걸 따라 다시 전진하고, 몇 번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무슨 돌격대마냥 건반 끝까지 전진하게 된다. 손모양을 둥글게 하라는 조언이 이 곡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 한 옥타브 분산화음을 치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저절로 펴지게 되고 거기에 조금 전에 언급한 상황이 겹치면서 무슨 몽골 기마부대마냥 무한 전진이 시작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가운데 손가락 끝부분을 잘라서 손가락들의 길이를 일정하게 맞춰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다.
김윤석과 강동원이 출연한 영화 '검은 사제들'에는 악령에게 빙의된 박소담을 침대에 묶어놓고 퇴마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약간의 깨알 개그 요소가 있는데 CD 플레이어에서 바흐의 칸타타 140번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가 흘러나오자 박소담이 눈을 희번득대며 '망할 바흐'라고 소리친다. 어떤 블로거가 이 대목을 나름대로 해설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바흐 칸타타의 가사를 분석하며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악령이 발끈했는지 꽤 심오하게 분석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칸타타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명의 신부 비유를 토대로 한 것으로, 악마가 들었을 때 그다지 화낼만한 요소가 많지 않다. 훨씬 악마를 자극할 수 있는 다른 성경구절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냥 악령이 살아 생전 바흐 피아노 곡을 연습해본 경험이 있어서 조건 반사적으로 바흐의 음악을 듣자 성질을 부린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가가 예전에 피아노를 배우며 바흐 때문에 골탕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언젠가 세상에 대고 한 번 외쳐보고 싶었던 말을 배우의 입을 통해 외친 것일 뿐으로 추측된다. 그게 인벤션이 되었든, 푸가가 되었든 잘은 모르겠지만, 바흐의 음악은 듣기에는 너무 좋으나 막상 연주해보면 욕을 유발한다는 것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이 곡을 연습했던 시기는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던 슈만의 아동학대곡을 연습했던 시기와 겹친다. 연습실에서 두 곡의 악보를 꺼내면 한숨부터 새어나온다. 아비지옥을 먼저 맛보아야 하는가, 규환지옥을 먼저 맛보아야 하는가. 게다가 앞선 글에서 말했다시피 내 선생님은 대단히 까다로운 분이다. 연주가 어설프면 진도를 안 나가고 계속 무한반복을 시킨다. 두 달 동안 곡의 1구간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악상을 지킬 것까지 요구한다. '손가락 맞추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악상까지 어떻게 표현해요. 한 번에 하나씩 요구하셔야지 이렇게 한 번에 여러 개를 요구하면 어떡합니까.'라고 하소연했더니만 의외로 순순히 '알겠습니다'라고 인정하신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설 분이 아닌데 웬 일이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쯤 뒤에 제대로 앙갚음을 당했다. --;
이 곡도 대략 두 달은 붙잡은 것 같은데, 물론 진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느렸다. 이래가지고는 내년 요맘 때나 되어야 마지막까지 나갈까말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곡도 당분간 레슨을 보류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연습효과는 정말 엄청난 것 같아서 날마다 두 번 정도는 꼭 연습한다. 비록 아직도 1구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내 스스로 느끼기에 이전보다 손가락 놀림이 훨씬 자유로워진 것 같다. 가령 프렐류드 1번을 연습해보면 이전보다 훨씬 음들의 간격이 고르게 난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전에는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약간 껄끄럽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는데 요즘에는 그냥 한 손으로 이어서 치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연습했던 곡들에서 느꼈던 뭔가 엉성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악보에 16분 음표가 나열되어 있어도 '뭐 프랠류드 2번만 하겠어?' 하는 자신감 똥배짱이 생긴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지금도 날마다 이 곡의 악보를 피아노에 얹어놓고 다른 곡들을 연습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심호흡을 하면서 두 번씩 연습하고 있는데 조금만 집중 안 하고 딴 생각하면 곡이 흐트러진다. 집중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비극성이 내재되어 있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