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회화 새벽반을 처음 나갔을 때, 나는 아주 간단한 자기소개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반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대화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안 되는 영어회화 새벽반에는 무역업을 하시는 사장님, 현직 중학교 영어선생님,
대학생 형 두 명, 미국에서 몇 년 살다 오신 아주머니, 그리고 그 회화학원 원장님까지
모두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우리반을 담당하고 있던 외국인 선생님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산타바바라 출신 흑인이었고,
비록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평소에 볼 수 없는 흑인과
매일 아침 인사한다는 그 사실에 스스로 뿌듯하고 즐거웠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학원을 다녔던 나는
또래에 비해 ‘영어를 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학교에선 영어수업시간이 제일 자신 있었고 그만큼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영어회화 새벽반에서도 이젠 어느 정도 내 생각을 전달하는 수준에 도달했고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어렵지 않게 교내 영어경시대회에서 수상을 할 수 있었고
기타 외부기관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영어 레벨 테스트 및 경시대회에 참가하고 수상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고등학교 진학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국단위 영어경시대회에서 몇 번의 수상경력이 있었고
또 전교회장직을 맡으며ㅋ 외국어고등학교로의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2001년 여름, 내가 목표로 하던 한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수상자들에 한해서
영어특기자 특별전형으로 입학자격이 주어진다는 영어경시대회를 개최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가한 경시대회에서 매우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고 그토록 원하던
한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결과가 발표난 후부터 수많은 유학원에서 집으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유학원들은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 학비와 기숙사비, 기타 등등을 합쳐서 너무 많은 돈이 들게 된다며 그보다는 미국으로 청소년 교환학생을 보내는 것이 더욱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좋은 선택이라고 이야기했다.
미국 국무성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으로 사립학교처럼 많은 등록금이 필요하지도 않고,
미국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기 때문에 미국 문화도 배우고 미국 경험도 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셨다. 하지만 까먹고 있었던 나의 ‘나도 미국 가고 싶다’병이 다시 재발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의 마음은 미국에 가있었다. 분명 나의 영어수준이 유창해 질 때쯤이면 미국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냐며 때를 쓰기 시작했고 부모님께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환학생 서류 준비를 시작하셨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외국어고등학교와 미국 현지생활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가을,
미국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내가 홈스테이를 하게 될 가족의 사진들과 그들의 환영 메시지였다.
그 편지와 함께 나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 미국으로 가자."
우선 1년간 교환학생을 경험해 보기로 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