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것
오늘도 지난주와 같은 스타벅스에 왔다. 아쉽게도 같은 자리는 사수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나오느라 조금 늑장 부렸더니 2층 창가는 만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구석의 소파 자리에서 노트북을 폈다. 캐리어를 두 개나 가지고 올라온 여행자가 맞은편 의자에서 내내 다리를 떤다. 집중하자, 집중.
이번주는 입사 첫 주였다. 비자를 지원하는 스페인 회사에 이직한 게 내가 마드리드로 오게 된 이유다. 회사는 회사일뿐이라지만, 이번엔 입사 전부터 잘해봐야겠다는 부담감이 좀 컸다. 어쨌든 회사도 만 킬로미터(마드리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약 만 킬로미터라고...!) 떨어진 곳에서 마케터를 데려온 데엔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에 대한 성의는 보여야지.
이 생각이 은연중에 날 짓누르고 있었는지, 출국 준비를 하며 일을 쉬는 한 달 정도가 마냥 즐겁지 않았다. 때때로 입사하지도 않은 회사가 꿈에 나왔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료들과 밤새 허상의 논쟁을 했다. 물론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으니 타지 생활을 택한 거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란 얘기다. 예컨대,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내가 스페인어 까막눈으로 스페인 회사에 취업해도 괜찮을지. 그다음엔, 언어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마케팅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
주변인들은 연고도 없는 나라에 가서 어떻게 살 거냐, 그 회사는 멀쩡한 회사가 맞냐 등을 물었지만 정작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 제일 고민스러웠다. 외부 변수들이 잘못되면 남 탓을 할 수 있지만, 내가 못하면 우울로 빠질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부딪혀야 매듭지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11월 마지막 주 월요일, 잔뜩 흐린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는 걸 보며 첫 출근했다.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방엔 이미 15명 정도의 사람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나 말고도 입사자가 10명이 넘었다. 첫 회사를 제외하곤 직원이 100명 미만인 곳만 다녀서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다. 같은 팀은 없지만 그래도 입사 동기가 있다는 게 어디야...! 기존 직원들의 관심이 분산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회사 노트북으로는 16인치 맥북 프로를 받았다. 잠깐 좋았다가 이걸 가지고 출퇴근할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재택이 많은 회사라 주 2-3회는 노트북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하는데, 그냥 들어도 무거운 걸 어떻게 40분씩 들고 온담. 좀 다녀보고 정 안 될 것 같으면 교체 신청해야지. 지금 보니 키보드 배열도 스페인어식이네. 이건 키보드 커버로 해결해야 하나. 자리에서 장비 셋업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물론 이곳의 시계는 스페인식으로 돌아가니 점심시간이라 하면 오후 2시와 3시 사이다.
첫날 점심은 팀원들과 함께였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애피타이저 - 메인 - 디저트로 구성된 간단한 코스요리를 먹었는데, 메뉴 선정부터 음식이 나오기까지만 40분이 걸렸다. 그 시간은 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대화로 채웠다. 나에게로 관심이 집중되는 건 긴장되진 않지만 부담스럽다. 음식이 나오는 게 어찌나 반갑던지.
메인으로 고른 미니 버거 세트보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주키니 부라타 샐러드가 훨씬 맛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몰토크에 어질어질한데도 주키니랑 부라타 조합이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두 시간의 길고 긴 식사를 마치고 나니 팀원들과의 대화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이 짧은 순간에도 적응을 해버리는 동물이구나. 새삼 다행스럽네.
빠르게 규모를 키운 조직이라 그런지 사용하는 툴과 시스템이 정말 많았다. 개중에는 내가 사용해 본 것도 있지만, 전혀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가이드나 튜토리얼 영상이 있어도 스페인어 버전인 경우가 많아 약간 막막해졌다. 공식적으로는 영어로 업무를 진행한다지만,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이나 내부 문서들은 스페인어로 오가는 경우가 꽤 있을 거다. GPT로 번역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결국엔 내가 스페인어를 빨리 배우는 수밖에 없다...
언어적 한계로 온보딩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팀원들이 엄청 친절해서 그 우여곡절을 견딜만했다. 마드리드 본사에만 직원이 1000명이 넘고 아무리 재택이 자유롭다지만 반 정도는 매일 사무실에 출근할 텐데, 일주일간 사무실에서 본 동양인은 손에 꼽는다. 영국에서, 미국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온 직원들은 여럿인데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직원들은 찾기 어려웠다. (중국은 어느 지역과도 마케팅으로 묶일 수 없기에 제외하고...)
다행히 며칠 후 회사에 나 말고도 한국인이 4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나눴지만 그게 어디야. 12월 중순에 같이 저녁 먹기로 했다!
일은 그럭저럭 파악했는데, 다른 게 더 적응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초면인 사이에도 포옹한 채 양볼을 맞대는 인사를 나누는 문화. 본래의 성격보다 훨씬 친근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스페인 사람들과 스페인 회사에 적응해 버린 외국인들은 매사에 밝고 열정적이다. 인사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지... 부디 당황한 티가 많지 안 났길.
"우리 토요일 점심에 팀 런치 할 건데, 올 거지?"
영어로 하니 팀 런치지 결국 회식이잖아요. 어째서 주말에 하는 거죠. 입사하자마자 시니컬한 직원으로 보일 순 없어 최대한 돌려 물었다. 토요일에 밖에서 만나 점심 먹는 게 문화냐고.
"스페인 사람들은 연말에 모임이 많아.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에서든 가리지 않고."
특히 2-3주씩 길게 연말 휴가를 쓰는 스페인 사람들은 11월 말에도 회식을 하는 일이 잦단다. 토 달지 말고 가자 그냥...
그래서 토요일 점심도 동료들과 함께였다. 제시간에 온 사람은 나와 다른 한 사람뿐이었다. 나만 또 시간 약속에 진심이지. 그래도 15분 안에 대부분이 도착했고, 하나같이 스페인 사람들은 약속 시간에 "관대"하단 얘기를 덧붙였다. 스페인 타임 오케이.
3시부터 시작한 회식은 5시 반까지 한 곳에서 이어졌다. 대화 내용이나 서로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이들은 사적으로도 매우 가까워 보였다. 선을 긋진 않지만 회사 사람과 사적으로 친해지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나로서는 이 역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내가 이 조직에 흡수되려면 언어만이 문제가 아니겠구나. 마음의 문을 많이 열어야지만 가능하겠구나! 쉽지 않겠는데...?
스페인은 지역색이 뚜렷한 편이라 같은 스페인어를 해도 쓰는 단어나 톤이 각양각색이란다. 마드리드 외의 지방도 그렇지만, 멕시코식 스페인어는 정말 다른 점이 꽤 있다고. 우리나라처럼 사투리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발음이나 단어를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팀원들의 대화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했다. 아니 대화가 또 되는 게 신기하네.
2차로는 칵테일 바를 가자는 팀원들에 휩쓸려 장소 이동까지는 했다. 그런데 첫 주부터 너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 것 같아 이쯤에서 빠져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결국 어찌저찌 인사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쿵쿵 울리는 음악과 여기저기를 비추는 핀조명들에서 벗어나니 좀 해방감이 들었다.
집으로 천천히 걸어오는데 길거리마다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반짝였다. 십자가 문양인 것도 있고,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종과 리스 모양인 것도 있고.
골목길을 지나 우리나라의 강남대로 같은 그랑비아 거리를 걷는데, 트리 모양으로 거대한 초록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공간도, 그 안의 사람들도 연말 분위기를 한껏 누리는구나. 북적거리는 군중 속에 서 있는데도 제삼자의 눈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즐거워하는데 나는 우뚝 서서 그걸 관찰하고 있는 느낌. 여행자일 때와는 전혀 달랐다.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생경했다.
출퇴근을 시작하니 새로운 도시에서도 점점 삶의 리듬을 찾고 있다. 아직 2주밖에 안 됐지만 매일매일이 새롭지만은 않다. 먹어본 음식을 또 사 먹고, 아침에 러닝 했던 코스를 저녁에 다시 산책하러 가고. 어떤 식당이나 카페가 프랜차이즈인지 알겠고, 스페인 사람들이 자주 짓는 표정이나 제스처를 이해하게 됐다. 스페인어로는 아직도 인사밖에 못하는 외국인이지만, 매일 한 겹 씩 낯섦을 벗겨내고 있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니 나만의 루틴을 찾고 싶어졌다. 지금까지는 운동과 글쓰기로 두 축을 세웠다. 회사와 제휴를 맺은 헬스장에 등록해 벌써 몇 번 방문했다. 한국에서처럼 실내 사이클과 트레드밀로 땀을 쭉 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헬스장이 안 내키면 야외에서 5킬로 정도 뛰었다. 마드리드엔 큰 공원이 정말 많고, 아침저녁으로 러닝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그 안에 적당히 섞여 뛰다 보면 눈도 정화되고 잡생각도 사라진다.
글쓰기도 한국에서처럼 틈날 때마다 공책이든 노트북이든 펴 본다. 그냥 유튜브 보기로 이어지는 날도 꽤 많지만 아직까지는 아쉽지 않게 스페인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블로그는 떠오르는 것 아무거나 편하게, 브런치는 진득하게 생각을 정리해서 일주일에 한 번 줄글로.
이렇게 축이 몇 개 더 생기고 사라지면서 나만의 반복적인 일상이 생기겠지. 그게 긴장감 없이 무료해지면 내가 마드리드에 완벽히 적응했다는 뜻이리라. 내가 무료함을 기다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의 나는 또 어떤 새로움을 찾고 싶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