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를 닮은 그 사람을 아시나요?
하루 종일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이곳은 서울역. 군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나이불문, 금발머리
외국인부터 티베트 불교 승려도 스쳐가는 곳이다. 친숙한 경상도 사투리부터 심지어는 평안도 사투리까지
들린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종착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종착지로 향하기
위한 열차를 기다리고 있거나, 종착지에 방금 도착했다. 그 속에서 홀로 종착지와는 무관한 사람이
앉아있다.
그 사람은 14학번 백석대 야구잠바를 입었다. 군데군데 섞여있는 새치가 머리를 묘한 회색으로
만들었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린 듯 까맣고 눈썹과 수염엔 흰색 비듬 같은 것들이 붙어있다. 그는
머리색과 비슷한 캡 모자를 꾹 눌러썼다. 부스스한 머리가 캡에 눌려 밑부분이 부풀어 올랐다. 꽤 품질
좋아 보이는 남색 양복바지가 이질적이다. 언젠간 집이었을 그곳에서 나올 때 가장 좋은 옷이었으리라
예상해본다.
그 사람은 기다란 벤치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얇은 머리가 젓가락으로
꼬은 듯 곱슬 거리는 할머니. 빨간 체크무늬의 골프웨어에 빠알간 명품가방을 들었다. 여유 있어 보인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를 살핀다. 눈을 돌리는 사이 그녀에게 다가가 있다. “좀 도와주이소.”
직접 말을 거는 적극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할머니에게 내민다. 할머니는 무어라
몇 마디를 하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사람의 두 번째 레이더망이 발동했다. 은근슬쩍 그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혹시나 타깃이
자신이 될까 눈을 피했다. 열심히 관찰하던 나도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자 시선을 돌렸다. 아까 꼬치
사 먹으려 뽑은 지갑 속 2만 원이 생각났다. 만원을 꺼내 드릴까, 아님 죄송하다 말해야 하나. 이번 달
생활비가 넉넉지 않은데, 그래도 저분이 훨씬 힘들겠지. 드릴까? 더 달라하면 어떡하나, 온갖 생각이
스칠 때, 그의 눈은 나를 무사히 지나 세 아주머니에게 안착했다.
40대쯤 돼 보이는 세 아주머니들이다. 같은 미용실에서 펌을 한 것인지, 그 동네 유행인 건지
머리스타일이 비슷한 그들은 벤치 두 개에 나눠 앉아 서로를 마주하고 수다를 떨고 있다. 14학번
할아버지는 그중 한 명의 빈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린다. “시골에서 올라오셨습니까~” 제법 싹싹한
목소리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마치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듯 목소리가 굵다. 그러나 ‘지요’라는 그
어미를 구성하는 억양은 기계적으로 비굴하다. 아주머니들은 표정을 굳히고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확 꺾는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무것도 없다.
서울역 14학번 할아버지는 자리로 돌아간다. 고개를 돌렸던 호호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어색한
정적이 감돈다. 뒤에 앉아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세 아주머니들에게 말을 건넨다. “시골에서 오셨어요?
요즘 단속한다는데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네요.” 그들은 웃음과 안도를 나눈다.
3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 철도 경찰이 벤치에 앉아있는 할아버지 앞에 선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아는 듯
‘ㅇㅇ씨’하고 부른다. 나가라는 신호다. 엉거주춤 일어선 할아버지는 짐이 많다. 빵빵한 종이가방 두
개에 조그마한 검정 천 캐리어 하나. 캐리어 잡을 힘이 없는 건지 잡기 싫은 건지, 손에 힘주라는 경찰의
성화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의 퇴장을 지켜본다.
벤치는 흥미를 잃고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그리고 그가 있던 곳에 총총 뛰어들어온 야윈 비둘기
한 마리. 이리 쫓아도 저리 쫓아도, 푸드덕 몇 미터 안 날아가 다시 슬금슬금 걸어온다. 혹시나
빵부스러기라도 떨어져 있을까. 오늘 저녁엔 배 부르게 잘 수 있을까, 하고 끊임없이 서울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 사람과 닮은 비둘기. 서글프고도 정도(正道) 없는 삶의 의지.
서울역의 마스코트, 그 사람. 그는 모두가 그의 집인 것을 아는 그곳에서 잠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