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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 Jan 01. 2023

"샤워는 60초 안에 끝내주세요"

스위스 산속에서 느낀 기후변화

매년 심해지는 듯한 이상기후이지만 2022년 올 한 해는 유난히 심했던 것 같다.


12월 현재 북미에는 재난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형한파가 닥쳤지만 스위스는 겨울 같지 않은 날씨 때문에 열었던 스키장 슬로프도 다시 닫아야 할 지경이다.


특히나 올해 여름은 이상기후가 더 심했다. 연평균 비교적 온난하고 한 여름에도 덥지 않아 보통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였는데 올해 여름은 너무나 더워 매일같이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다.


하지만 무더위보다 더 심했던 건 가뭄이었다.


몇 년 전 미국과 호주에 전례 없는 대형산불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을 때, 뉴스에 나오는 불탄 산과 마을, 대피하는 주민들과 피하지도 못하고 죽은 야생동물들 사진을 보며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실감이 안 났는데, 올해 스위스 거의 전 지역에 4-5단계 산불경보가 나고 주변 강과 호수가 말라버리니 정말 가슴이 탔다.


거의 여름 내내 아침에 눈뜨지 마자 혹시나 간밤에 어딘가에 비가 왔을까 혹은 오늘은 비가 올까 날씨 앱을 확인했다. 몇 주만에 처음 제대로 비가 내렸을 때는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우산이 있었음에도 그 폭우를 몸으로 다 맞으면서 들어갔을 정도로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드디어 비가 온다! - 8월 16일 스위스 뉴스


사실 가뭄이 닥쳐도, 제네바같은 도시에서는 길가에 있는 수풀이나 작은 나무가 말라가는 것 빼고는 (다행히!)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상하수 기반시설이 없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해야 하는 산악지역에서는 이런 가뭄이 닥치면 당장 쓸 물이 떨어져 큰 타격을 받는다.


그 불편함과 절박함을 너무나 체감했던 건, 루체른과 인터라켄 중간 즈음에 위치한 (스위스치고는 자그마한) 산악지역인 루게른Lungern에서의 2박 3일 하이킹이었다. 루게른은 작년, 그것도 똑같은 8월 첫째 주에 똑같이 2박 3일로 하이킹을 갔었다. 똑같은 곳을 굳이 다시 가려고 했던 건 작년에는 여름 같지 않게 너무 춥고 비가 많이 와 제대로 하이킹을 못해서였는데, 극과 극으로 올해는 너무나 덥고 가뭄이 심했다.


작년에 묵었던, 산 한가운데 오도카니 있어 너무 맘에 들었던 산장을 별생각 없이 예약을 하고 기차역부터 산장까지 8킬로 안에 고도 1100미터를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작년처럼 산장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에 소시지 뢰스티를 먹고 방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에 (산장이 고도 2000미터에 있어서 서늘한 편이다) 샤워를 하고 쉴 생각을 하며 올라갔는데 - 웬걸, 산장 레스토랑에서부터 벌써 물이 없어서 생수판매밖에 안 되고 있었다. 스위스 물이 깨끗하고 맛(!)도 좋아서 어느 레스토랑에서도 수돗물을 무료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데, 그 물이 없다는 거다.


점심을 마치고 방안내를 받는데 산장 주인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근방에 비가 안 온 지가 몇 주가 넘고 물을 산 아래 있는 마을에서 실어온다는 말을 하며 샤워는 꼭 60초 안에 끝내달란다. 한 여름에, 거의 반나절에 걸쳐 가파른 산길을 따라 하이킹을 하고 왔는데 60초 샤워라니... 시작 전부터 걱정이 됐지만, 물을 먼저 끼얹고, 비누하고, 대충 거품을 흘려보내고 나니 짧아도 60초 샤워가 불가능하진 않았다. 차가 다니는 길이 없는 지역엔 헬리콥터로 물을 실어 날아야 할 지경이라니 마음이 무거워 물도 세게 틀지 못했다.


청량해 보이지만 사실 산불주의보 4단계 발령 중


저녁을 먹고 산장 근처로 산책을 나갔는데 산에 방목하는 소들이 물통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산 한가운데에서는 보통 호수나 지하수에 연결된 호스로 물을 모아서 물통을 채우는데 몇 초에 몇 방울 떨어지지 않는 그 물마저 호스가 통밖으로 삐져나와 다 밖으로 흘러버리고 물통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은 진탕이어도 먹을 물이 없어 하릴없이 텅 빈 물통 주변에 주저앉아 있는 소들을 보니 눈물이 왈칵 났다.



소들이 사라진 다음날 아침, 하이킹 가는 길에 주변 돌을 모아다 호스를 눌러 고정시켜 놨다. 소똥이 섞인 진창에 빠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다가 오히려 생수통을 빠트렸지만 (물론 대충 씻어서 다시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갔다) 오후 즈음에 한 뼘만큼이라도 차 있는 물을 보니 오늘 저녁은 소들이 목을 좀 축일 수 있겠구나 싶어 전날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2022년 8월 루게른

올 해는 날도 청명하고 (그래도 고도 때문에) 너무 덥지도 않아 2박 3일 동안 하이킹은 실컷 할 수 있었지만, 물 길에 물이 없고 수량도 확 줄어든 호수를 보니 차라리 하이킹도 못하고 비 맞고 다녔어도 작년이 마음이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네바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맥없이 빈 물통을 핥던 소들이 모습이 떠나지 않아 샤워도 짧게 하고 빨래도 모아서 하고 최대한 물을 아껴 썼다.


2022년 7월 비가 안와 바짝 말라버린 화단 vs. 2022년 11월 따듯하고 비가 많이 와 여름같이 무성해진 화단 (제네바)


에티오피아에 살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기도, 인터넷도 아니라 물이다. 정전은 몇 번되도 사는데 단수는 한 시간도 안돼서 금방 조급해진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다시 추워질지, 계속 더울지. 또 다른 기록을 경신할지. 그저 우리가 조금만 더 공동체를 생각해 지혜롭게 행동해 함께 다가올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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