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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봄 Feb 04. 2024

하찮은 상담심리사의 사적인 일기 _ 일곱 번째 기록

난임이야기 part 1

결혼 후 1년은 신혼을 즐기고 아기를 갖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친구들의 임신소식이 들렸고, 난 초조해졌다.

우린 신혼을 즐기는 중이니까 라며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축하해 주기엔 내 신혼생활은 생각보다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외로웠고 비참했다. 


자취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혼자만의 시간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불도 켜지 않은 방에 들어가 컴퓨터게임을 했고 무엇보다 주말엔 당연히 밤새 게임을 했다. 주말마다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자는 건 너무 쓸쓸했다.


반면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색했던 나는 남편이 게임을 할 동안 거실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는 게 다였다.

취미생활을 가져보라는 남편의 권유에 이것저것을 해보려 했지만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

의미 없이 핸드폰만 하게 되니 인스타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부러운 생활들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고, 결국 난 인스타를 삭제해 버렸다.


사실 남편이 '매일매일' 게임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같이 하자는 것은 뭐든지 해 주었으며, 남편이 먼저 같이 할 취미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매우 자주' 이러는 남편에게 투정 부리기엔 신혼생활을 불만족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납득되지 않았다. 너무 못나보였다.


신혼이라고 해서, 함께 산다고 해서 모든 걸 함께 해야 하는 건 아닌데도 괜히 남편이 나에게 소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땐 참 신혼집이 답답하고 싫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임신을 하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빨리 임신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1년은 신혼을 즐기고 갖자라는 입장이었고, 그때마다 내 깊은 마음속에선 '도대체 우리가 뭘 즐기고 있는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건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서운한 내색을 비추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할거 없는 시간에 게임 좀 한다는데 그게 뭐 서운할 일이냐는 식으로... 그리고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라는 말로 내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그러니  자존심이 얼마 남지 않을 수밖에.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은 서운한 것도 없는 줄 아는가.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도 못하는가.


남편이 그럴 때마다

'그게 상관인데?'라고 대꾸하면 남편은 '또 삐진다'

라고 한다. 그땐 남편의 이런 대화패턴이 싫었다.

내가 서운하다고 하는 것을 삐졌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

남편의 대화패턴은 늘 나를 쫌생이로 만들었다.

그 대화패턴은  아직도 여전하다.


어쨌거나 난 생리가 불규칙했고

피임을 하지 않고 1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난 남편이 '굳이 뭐 그렇게까지 하냐'라는 핀잔에도 혼자 병원을 다녔다. 왠지 잘 모르겠지만  임신이 잘 안 될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청소년 시기부터 생리를 했다 안 했다, 주기가 길었다 짧았다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혼자 병원을 다니면서 배란 유도제를 먹고, 주사를 맞고, 배란일을 받아 임신 시도를 하기를 6개월 정도...

6번이나 시도를 했음에도 아무 소식은 없었다.


그때 당시 내 직장은 개인 정신과 병원이었다.

즉 내가 다녀야 하는 산부인과 진료시간은 곧 내 근무시간과 같다는 뜻...

병원은 토요일에 진료가 많기 때문에 주로 평일에 휴무를 갖는다. 남편과 병원을 같이 가려면 매 번 남편이 연차를 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토요일은 워낙 환자가 많아서 하루 쉬겠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원장 선생님이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병원에서 3년을 근무하는 동안 토요일에 일을 뺀 적은 딱 번이었다.

한 번은 나의 결혼식.

한 번은 시댁 어른이 돌아가셔서...

그것도 '굳이 가야 하나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여담이지만 원장 선생님의 이 말은 내가 사직서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아무튼 난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서 꾸역꾸역 난임센터를 다녔다. 남편도 이렇게 시도해도 되지 않으니 위기감을 느꼈는지 적극적으로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임신을 위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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