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상담심리사의 사적인 일기 _ 일곱 번째 기록
난임이야기 part 1
결혼 후 1년은 신혼을 즐기고 아기를 갖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친구들의 임신소식이 들렸고, 난 초조해졌다.
우린 신혼을 즐기는 중이니까 라며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축하해 주기엔 내 신혼생활은 생각보다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외로웠고 비참했다.
자취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혼자만의 시간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불도 켜지 않은 방에 들어가 컴퓨터게임을 했고 무엇보다 주말엔 당연히 밤새 게임을 했다. 주말마다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자는 건 너무 쓸쓸했다.
반면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색했던 나는 남편이 게임을 할 동안 거실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는 게 다였다.
취미생활을 가져보라는 남편의 권유에 이것저것을 해보려 했지만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
의미 없이 핸드폰만 하게 되니 인스타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부러운 생활들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고, 결국 난 인스타를 삭제해 버렸다.
사실 남편이 '매일매일' 게임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같이 하자는 것은 뭐든지 해 주었으며, 남편이 먼저 같이 할 취미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매우 자주' 이러는 남편에게 투정 부리기엔 신혼생활을 불만족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납득되지 않았다. 너무 못나보였다.
신혼이라고 해서, 함께 산다고 해서 모든 걸 함께 해야 하는 건 아닌데도 괜히 남편이 나에게 소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땐 참 신혼집이 답답하고 싫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임신을 하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빨리 임신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1년은 신혼을 즐기고 갖자라는 입장이었고, 그때마다 내 깊은 마음속에선 '도대체 우리가 뭘 즐기고 있는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건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서운한 내색을 비추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할거 없는 시간에 게임 좀 한다는데 그게 뭐 서운할 일이냐는 식으로... 그리고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라는 말로 내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그러니 내 자존심이 얼마 남지 않을 수밖에.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은 서운한 것도 없는 줄 아는가.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도 못하는가.
남편이 그럴 때마다
'그게 뭔 상관인데?'라고 대꾸하면 남편은 '또 삐진다'
라고 한다. 그땐 남편의 이런 대화패턴이 싫었다.
내가 서운하다고 하는 것을 삐졌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
남편의 대화패턴은 늘 나를 쫌생이로 만들었다.
그 대화패턴은 아직도 여전하다.
어쨌거나 난 생리가 불규칙했고
피임을 하지 않고 1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난 남편이 '굳이 뭐 그렇게까지 하냐'라는 핀잔에도 혼자 병원을 다녔다. 왠지 잘 모르겠지만 임신이 잘 안 될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청소년 시기부터 생리를 했다 안 했다, 주기가 길었다 짧았다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혼자 병원을 다니면서 배란 유도제를 먹고, 주사를 맞고, 배란일을 받아 임신 시도를 하기를 6개월 정도...
6번이나 시도를 했음에도 아무 소식은 없었다.
그때 당시 내 직장은 개인 정신과 병원이었다.
즉 내가 다녀야 하는 산부인과 진료시간은 곧 내 근무시간과 같다는 뜻...
병원은 토요일에 진료가 많기 때문에 주로 평일에 휴무를 갖는다. 남편과 병원을 같이 가려면 매 번 남편이 연차를 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토요일은 워낙 환자가 많아서 하루 쉬겠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원장 선생님이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병원에서 3년을 근무하는 동안 토요일에 일을 뺀 적은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나의 결혼식.
한 번은 시댁 어른이 돌아가셔서...
그것도 '굳이 가야 하나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여담이지만 원장 선생님의 이 말은 내가 사직서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아무튼 난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서 꾸역꾸역 난임센터를 다녔다. 남편도 이렇게 시도해도 되지 않으니 위기감을 느꼈는지 적극적으로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임신을 위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