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보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中
입술을 통해 내뱉는 말은 때때로 충동적이고 그 힘은 강력하다. 가시 돋친 말 한마디의 잔 울림은 상대의 마음속에 남아 계속해서 진동하며 생채기를 낸다. 글로 하는 말과 입으로 내뱉는 말이 다른 점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글은 쓰면서, 그리고 다시 읽어보면서 최소한 두 번은 점검할 수 있다. 어릴 적 손 편지를 쓸 때는 항상 연필로 쓴 후에 볼펜으로 그 위에 글씨를 따라 썼다. 볼펜으로 덧쓰면서는 연필로 썼던 비문들을 고치거나 아쉬운 표현을 내 진심과 더욱 가까운 단어로 바꿔 적기도 했다. 그러고는 연필 자국들을 지우고 지우개 가루를 호- 호 - 털어내면 나의 가장 선명한 언어들이 남아있었다. 내 마음에서 거르고 건져낸, 수신인만을 위해 선택된 단어들이 편지지 위에 정갈히 앉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입을 통해 하는 말은 다르다. 입을 통해서는 자꾸 말이 헛나오기도 했고 너무나 무심해서 상처 되는 말들이 마구 던져졌다. 입은 내가 가진 얕은 이해심과 성급함, 어리석음을 무자비하고도 성실하게 전달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 친구와 말다툼하다가 결국 선생님께 혼났던 날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날 선생님께서는 컵에 물을 떠 오라고 하시더니 나와 친구 앞에서 컵을 뒤집어 물을 바닥에 쏟으셨다. 그러고는 물을 컵에 다시 담아보라고 하셨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하던가. 내가 했던 말들도, 쏟아냈던 화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그날을 계기로 또렷이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역시 나는 의도적으로, 때론 의도치 않게 너무나 많은 물을 땅바닥에 부워버렸다. 주워 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키스할 수 있는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는 존재. 이보다도 사람을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여기서 다시, 이 문장을 뒤집어 보면, 사람은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는 입술로 키스도 할 수 있는 존재다. 특히나 엄마와의 대화는 애와 증을, 희와 비를 일주일에도 몇 번이고 넘나든다. 너무나 깊고 복잡하게 얽혀 의지하고 있어서, 서로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랑해줄 수 있는 동시에, 그만큼 증오할 수도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가장 슬프게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의미의 무게를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해가는 과정에 있다. 더 어렸을 땐 그런 나의 위치가 내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자 특권인 것마냥 휘둘러댔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삶이 아니라는 절규와 함께 공격적인 말들을 쏘아붙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 똑같은 입술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대한의 사랑과 사죄와 위로의 말들을 만들어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는 문장은 거창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노력이 상대에게 전해지기만 한다면 어떤 미사여구도, 부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의 입은 앞으로도 너무 많은 미사여구와 부연 설명을 붙일 것이고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또다시 가장 깊은 상처를 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치의 사랑을 담은 한 문장을 입 밖에 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싶다. 연필로 썼다가 볼펜으로 덧쓰고 지우개로 지워 전하는 진심도 좋지만,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한 충동으로, 나의 몸으로 그 문장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음성의 잔 울림이 상대의 마음속에 남아 그 안에 난 생채기를 잠시나마 쓰다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