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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Oct 20. 2023

인내를 사랑이라 부르지 말라(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느낌 있는 일상

<답신>


  어제 나의 최애 서점 ‘딴뚬꽌뚬’에서 서평 쓰기 모임이 있었다. 평소에 잘 가지 못하는 서점인데 2주에 한 번 모임이 있어 반갑게 드나든다. 이번 모임 책은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이다. 지난 7월에 출간되어 벌써 2쇄를 찍었다고 한다. 부럽다. 난 최은영 작가의 책 중에서 『쇼코의 미소』를 처음 읽고 반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참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단편집 중 내 마음을 흔든 작품은 <답신>이다.


  문체는 언니의 딸에게 보내는 동생(이모)의 편지글 형식이다. 집안에 가장 역할을 하는 큰딸(언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가 있다. 왜일까? 아들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버지의 냉대를 받은 언니는 일찌감치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언니 나이 22살에 상대는 12살이 더 많은 학교 교사다. 언니가 임신했기 때문에 몸만? 가게 된 결혼에 신랑은 가진 거 없이 시집온다며 무시한다. 만삭인 언니가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켜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다. 동생은 언니 집에 가서 청소를 해준다. 언니 남편은 언니를 무시하고 동생도 무시한다. 동생은 열심히 일하고 체력 관리를 한다. 호텔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쉬는 시간에 복도로 나와 서울 야경을 본다.


  "그럴 때면 내가 아직 스물두 해밖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 벌써 백 년을 산 것 같은데, 이미 너무 오래 산 것처럼 지쳐버렸는데 아직도 스물둘이래." (160쪽)


  동생은 돈을 모아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가 보태준 대학 등록금을 일부 갚았다. 언니의 남편은 내가 준 돈다발이 어디서 났냐며 출처를 캐묻는다. 그 남자는 돈다발을 동생에게 던지고 언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민다. 동생은 그 남자의 팔을 꺾는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남자의 손을 풀어주자, 반대 손으로 언니를 다시 민다. 그 남자는 또 다른 학생을 차에 태운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학생이 차를 타지 못하게 막은 동생은 무고죄로 감옥에 간다.


  난 최은영 작가에게 묻고 싶다. 왜 동생을 감옥으로 보냈는지, 왜 동생이 그 남자를 더 패서 다시는 언니에게 꼼짝 못 하게 하지 않았는지. 동생(이모)은 왜 이런 이야기를 조카에게 직접 말로 하지 않고 편지글로 썼는지. 편지라니, 21세기에 무슨 편지란 말인가! 다 떨쳐버리고 조카랑 언니랑 셋이 힘을 모아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건가? 잘못은 그 남자가 했는데 왜 언니가 힘들어야 하는가? 동생은 왜 감옥에 가야 하는가?


  아버지의 사랑,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은 결혼해서도 남편 복이 없는 것인가. 아내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내는 물건이 아니다. 아내는 시녀가 아니다. 난 작가에게 말하고 싶다. 글을 수정해 달라,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 달라, 그 남자로부터 언니를 해방하라.


백 년을 산 것 같다고 말하는 동생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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