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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고요 Dec 23. 2022

그 '밥'을 떠올리며



동지다.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12시. 출근길 죽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팥죽 세 개 포장해 주세요.”

“동지 팥죽이요?”

팥죽과 동지팥죽이 다른가?

궁금해졌지만 “네” 하고 대답했다.


4시간 이상 근무를 하면 법적으로 30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동안 주로 책을 읽었다. 한두 번 커피를 사러 나가기도 하고 동네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이 활짝 열려있는 마트를 보았다. 아이들 간식이나 사둘까 하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과자류도 다양했고 식자재도 저렴했다.

무엇보다 채윤이가 좋아하는 덜 익은 바나나가 있었다.

처음 보는 과자를 고르고 토마토와 바나나도 한 봉지씩 샀다.


저녁에 먹을거리를 떠올리며 마트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과자로 채우기 시작한 장바구니가 오이, 당근, 양파 같은 요리재료로 변해갔다. 날이 추워졌기 때문에 사둔 물건은 차 안에 두어도 괜찮았다. 책 읽기 대신 장을 보는 날이 더 많아졌다. 오늘은 저녁에 먹을 동지팥죽을 미리 사두었다.



6시에 퇴근하고 집에 가면 6시 30분.

아이들은 내게 매달리고 뽀뽀를 하면서도 장바구니에 머문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배고파. 엄마, 오늘 저녁은 뭐야?"


아이들은 8시에 아침밥을 먹고 12시쯤 급식으로 점심밥을 먹는다. 저녁밥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먹는다. 허기지고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하다. 간식도 넉넉하게 챙겨 놓았고 먹고 싶은 거 사 먹으라고 카드도 집에 두었지만 밥이 먹고 싶다고 한다.


배고프다는 아이들 성화에 겉옷만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큰 냄비 하나, 작은 냄비 하나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야채들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싱크대 앞에 섰다.


팥죽을 그릇에 담아 큰 냄비에 중탕으로 데운다. 먹성 좋은 아이들을 위해 칼국수도 삶는다. 함께 가져온 반찬들을 접시에 담는다. 나름 10년 차 주부의 내공으로 요리 시간을 줄여본다. 그래도 밥 한 숟가락 뜨려면 삼 사십 분쯤 지나야 한다.



엄빠랑 같이 배부르게 먹어야 ‘밥’


아이들이 말하는 ‘밥’은 무엇일까. 치킨을 먹어도 밥, 스파게티를 먹어도 밥, 갓 지은 밥도 밥이다. 반찬가게에서 사 온 반찬과 국을 먹어도 밥이란다. 친구랑 먹은 마라탕은 간식이란다. 엄빠(아빠, 엄마)랑 같이 배부르게 먹으면 ‘밥’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기준으로 따지면 밥의 조건에는 ‘가족’이 들어간다.

다 같이 모여 배부르게 먹어야 비로소 ‘밥’이 된다. 배와 함께 마음까지 든든해져야 ‘밥’인 것이다.


삶터를 옮기기 전 우리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내느라 하루 한 끼 같이 먹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야근도 번갈아가면서 했다. 저녁밥은 함께 먹는 날은 대부분 주말이었다. 그마저도 출근을 하거나 모임이 있는 주에는 ’ 밥’을 먹는 일은 불가능했다.


우리 부부는 삶터를 옮기며 일터도 옮겼다. 남편도 나도 회사가 가깝고 야근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밥의 조건을 고민해 본다. 지금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마도 정시퇴근이 가능하기 때문 아닐까.


정시퇴근은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

밥을 차릴 시간,

먹고 치우고 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가능하게 한다.


아이들이 말하는 '밥'을 먹기 위해

나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



뜨끈하게 데운 팥죽과 칼국수를 차려내었다.


"밥 먹자!"

"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는 것만으로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이 시간을 오롯이 지켜내고 싶다.


나는 오늘도 그 ’ 밥’을 떠올리며 5시간만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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