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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Nov 15. 2023

고3 담임의 수능 트라우마 극복기

고3 담임은 수능 감독이 면제되기 때문에 수능 전날 아침 학생들 수험표 나누어주고 나면 하루가 여유롭다.

오랜만에 '11월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기 위해 조퇴를 쓰고 원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2002년 11월 6일 수능 시험을 본 진광고등학교.


10년 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그 수능 전날 친구집 피시방에 가지 않았다면, 집에 가서 낮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래서 새벽까지 뒤척이지 않았다면, 그날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았고, 그리고 그 새벽 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마치 영화 '이프 온리'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작은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과연 여주인공에게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까?라는 무의미한 상상처럼.


점심시간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엄마가 싸주신 따뜻한 도시락을 먹으면서 울분을 토했던 21년 전 기억을 되새긴 후 모교 원주고등학교로 향했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5년 전 수능 감독을 하러 한 번 와봤기 때문에 그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끼진 않았다.


이번에는 건물 밖뿐만 아니라 안쪽까지 들어가서 20년 넘은 기억을 되새겨봤다. 3학년 올라가면서 새로 생긴 건물은 이제 많이 낡았다. 이제 1학년 5반 교실이 된 구(舊) 3학년 6반 교실 앞에서 기념사진도 한 장 남겼다.


사리면을 팔던 매점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떠들던 나무 의자는 그대로다. 급식소로 향하는 구름다리와 아침마다 복장 검사를 하던 쪽문 언덕에는 낙엽이 애처롭게 흐트러져있다.


20대 때는 11월만 되면 스산한 우울함에 휩싸여 지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최악으로 보낸 후, 그 후폭풍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많은 순간을 스스로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며 지냈으니까.


30대가 되면서 마주친 현실을 조금씩 극복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면서 점차 11월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그렇게 이제는 일부러 그 기억을 추억하러 찾아올 정도가 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지금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과거처럼 행복해 보이려 억지로 애쓰지 않고,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내일 수능 보는 모든 수험생들 부디 긴장하지 말고 최선의 실력을 발휘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인생은 항상 예측불가능하고 지금 좋지 못 결과가 나중에는 훨씬 좋은 방향이 될 수 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21년 전 제가 수능을 망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작가 강이석, 유튜버 지리는 강선생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석같이 빛나는 제자들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춘천여고 3학년 5반, 춘천고 2학년 1반, 그리고 제가 아는 모든 수험생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진심을 다해 응원합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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