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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Feb 28. 2021

관찰하는 습관이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

Josef Lada 체코 국민 작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습관


디지털이 아니라 필름 카메라를 일찍 손에 쥐어서 그런지 나는 평소 일상생활에 있어서 무엇이든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내가 정해 둔 프레임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만드는 습관적인 행동을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주 해왔던 것이다.


내키는 대로 일단 셔터를 눌러도 되는 디지털이 아닌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고 아껴야 하는 필름이 재료였기 때문에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는 없었다. 피사체를 자세히 관찰하고 원하는 빛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가 '이때다' 싶은 순간에 내 카메라에 담는 일과 그로 인해 생긴 사물을 오랫동안 보는 습관들. 그 관찰과 기다림의 시간들.


나는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사진을 찍었고(말 그대로 그냥 찍었고) 그것으로 인한 일련의 습관들이 몸이나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일 뿐이다.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내 눈은 프레임을 짜고 있다고 했다.


술에 취해야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그리 친하지 않았던 학교 선배가 언젠가 술에 취해 '네가 세상을 보는 각도는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그래서 난 너가 매우 재밌는 애라고 생각하고 또 궁금하기도 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고백이야 뭐야... 그날 난 '이상한 애, 재밌는 애'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밤잠을 설쳤지만, 그건 사랑 고백 같은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영원히 잊어버린 듯했다.


이상한 각도?! 이상한 각도라... 하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봐도 꽤 근사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80년대에나 있었을 법한 동네 문구점, 체코
화석처럼 변함이 없을 것 같았던 문구점 쇼윈도


광장에 딸린 우리 동네에는 많은 작은 상점들이 있는데, 모두 하나같이 80년대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뜯어고치고 새로운 제품들로 가게를 갈아엎었을 텐데... 수십 년 동안 인테리어도 제품도 주인도 지금 그 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었던 것 마냥 옛 모습 그대로이다.


풀, 크레용, 색연필, 스케치북, 하모니카...

수십 년 전 진열된 문구 제품 위로 켜켜이 먼지가 쌓이는 것 말고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았던 문구점 쇼윈도 안을 보다가 오늘은 다른 것을 발견했다.

1955년 달력이 아니고 2020년 달력이라고?!

Josef Lada 2020 요제프 라다? 조세프 라다? 이름은 처음 들어 보지만 저 그림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체코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달력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저 군인 아저씨를 보니, 언젠가 프라하 하벨 시장에서 본 담배를 피우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살찐 군인 인형이 떠올랐는데, 그 군인이 바로 요제프 라다의 대표작이자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체코 국민 소설인 '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캐릭터라고 한다.





체코 문구점 앞에 진열된 요제프 라다의 일러스트
Betlém 베들레헴 1935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동네 문구점뿐만 아니라 많은 상점 쇼윈도가 요제프 라다의 크리스마스 일러스트 판넬로 장식되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보러 마을 사람들과 동물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935년에 그린 베들레헴의 모습이라는데 2020년의 광장 상점에 진열된 것을 보니 '체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요제프 라다를 품고 산다'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Děti se sáňkami 1950 썰매가 있는 아이들
어디에나 있는 '요제프 라다'의 그림

달력, 유아용품, 그릇 등 알고 보니 정말 어느 곳에 나 있는 그의 그림이었다.

매일 가던 마트에서 시온 과자 패키지에도 그가 그린 '체코의 겨울 풍경' 그림이 있었다.

몰랐을 땐 그냥 지나쳐 가던 체코 국민 작가를 알고 보니, 체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요제프 라다의 그림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Ponocný Štědrý večer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특히 체코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 풍경 등을 담은 체코의 전통적인 느낌의 속담이나 민화를 그린 그림이 많아서 동네마다 서 있는 게시판에도 바뀌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스르륵~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고 유치 찬란하게 꾸며진 동네 게시판에 검은 개와 크리스마스의 자정을 알리는 피리를 부는 남자 그림이 핀으로 꽂혀있다.




myslivci v lese 숲의 사냥꾼 1955

그리고 새해가 되기 전에 요제프 라다의 그림 달력을 샀다.

너무나 많은 시리즈의 그림 달력이 있었지만, 12월 말쯤 되니 웬만한 시리즈는 모두 품절이 되어서 '동물 그림 시리즈'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나 귀여운 것!




Josef Lada 동물 그림 시리즈 달력
Svatba psa s kočkou 고양이와 개의 결혼식 1942

고양이 아가씨와 댕댕이 총각이 결혼을 한다고요, 이 얼마나 귀여운 상상력인가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보헤미아 지역의 Hrusice 흐루시체라는 마을에 요제프 라다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 알레나 라도바 Alena Ladová도 일러스트로 활동했는데 부녀의 작품과 소장품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체코에 있는 동안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요제프 라다의 흔적이 있는 소박한 Hrusice 흐루시체 마을.


프라하에도 '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단골 술집으로 나온 곳이 실제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하니, 마음만 먹으면 그의 그림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아, 물론 이 망할 놈의 역병이 끝을 보여야 하지만 말이다.


Josef Lada와 딸 Aleny

프라하, 맥주, 카프카, 밀란 쿤데라, 보후밀 흐라발, 알폰스 무하, 얀 쯔반크마이어 내가 알 던 체코의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을 만나면 정말 극히 일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체코의 구석구석 관찰하다 보면 오늘도 새로운 체코를 만날 수 있고, 관찰에서 한 발 더 다가가는 호기심은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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