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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Mar 09. 2021

마음속에서 구워진 작은 로망, 시나몬롤

카모메 식당의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여 로망을 버리지 마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속 한편에 남들은 모르는 작은 로망 하나쯤 가지게 되어 있지 않나.

블루라군에서 수영하기, 하바나의 오래된 클럽에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모히또 마시기, 발리에서 매일 눈뜨면 바다로 나가 서핑하면서 한 달 살기 같은 해외 로망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작게는 수채화 배우기, 피아노 배우기, 눈 오는 겨울날에 캠핑 가기 같은 나만의 소소한 로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 오는 밤, 위스키를 언더락으로 한 잔 만들어 홀짝이면서 턴테이블로 옛 음악을 듣는 로망을 가지고 있다는 친구는 매년 열리는 레코드 페어에서 열심히 디깅한 LP 음반을 한 장 한 장 착실하게 모으고 있다.

모아둔 LP 음반은 있지만 들을 방법이 없어 음반을 검색해 스트리밍으로 듣는다는 내 친구가 가진 로망의 아. 이. 러. 니. 함.

그래, 텐테이블 음악이 로망이지만 그것만 있다고 어디 되는 건가, 앰프도 들여야 하고 스피커도 웬만큼 좋아야지.

그래도 언젠가는 그 로망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거제도에 사는 친구는 둘이서 어디로든 떠나 즐길 수 있는 작은 캠핑카를 가지는 조금 거창한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투자했던 돈을 꽤 잃었고 그 로망은 이제 내려놓았다고... 친구 사이에 금이 갈 만큼은 아니지만 빌린 돈은 천천히 갚아도 되냐고 얼마 전에 내게 고백을 해왔다.

정말 그 투자만 잘되면 제일 먼저 캠핑카를 사겠다고, 한국에 오면 우리 같이 떠나는고야~~~ 라며 들떠 있었는데 남모르게 마음속에 오랜 간직해온 로망을 접을 때는 꿈을 접는 것에 비하는 상실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대책은 없지만 친애하는 친구여, 로망을 버리지 말고 언제까지고 마음속에 꼬깃꼬깃 품고 있으라. 

내 언제까지고 너의 로망을 응원하리니. 너의 로망을 나도 함께 즐길 것이니.




시나몬롤
직접 시나몬롤 만들기


친구들이 가진 로망과 달리 내가 가진 로망은 조금 작다. 시나몬롤을 직접 만드는 게 로망이니까 좀 작지 싶다.

15년 전 영화이자 힐링 영상의 대명사인 [카모메 식당]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너무 좋아했기에 여러 번 봤고, 당시 함께 살던 친구와 이 영화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두고 생활했을 정도니까 어쩌면 그저 좋아했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커피를 내리고 시나몬롤을 만드는 장면은 언제 봐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가본 적도 없는 머나먼 헬싱키에서 모니터를 뚫고 커피와 시나몬의 포근한 향기가 솔솔~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시나몬 향과 함께 자연스럽게 가슴속에서 이미 구워진 나의 작디작은 로망 하나 '시나몬롤 만들기'





시나몬롤 만들기


결국 인생의 여유는 복권이 답이었구나


카모메 식당의 주인인 '사치에'는 회사에서 십 년을 근속하면서 매달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 가장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예금 통장에 찍힌 숫자를 바라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사람.

혼자서 식당을 열기 위해 긴 시간 동안 돈을 모았지만 결국 헬싱키에 가게를 낼 수 있었던 것은 1등이라는 복권 당첨금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이런 내용은 없지만 후에 원작 책에서 '당첨운'이 좋아 태어나 처음으로 복권을 사고 거짓말처럼 당첨이 되었다는 이 부분을 읽고 솔직히 배신감이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머나먼 외국 헬싱키에서 식당을 차리고 손님이 없어도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면서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보여주던 것은 '복권 당첨자'의 여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내용을 친구들에게 알려주면 하나같이 배신감이 찾아왔다고 했다.

'뭐야~ 결국 그 여유로움은 복권 당첨에서 나온 거였구나?! 그렇지 복권이 답이지!'


사치에는 평생 검소하고 근면한 사람이었는데, 우리에게는 왜 이 알 수 없는 복권 배신감이 찾아왔을까.

뭔지 모를 배신감 그럼에도 나는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의 인생을 응원한다. 

나에게 동화 같은 복권 당첨의 기회는 없겠지만 그녀들의 인생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치에처럼 미도리처럼 독창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알기에.





막 구워낸 시나몬롤


마음속에서 구워진 나의 작은 로망, 시나몬롤


나는 어쩌면 좋아하는 [카모메 식당]을 가슴에 품고 시나몬롤의 로망을 이루기 위해 여기, 체코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집 건물 아래의 오래 방치된 와이너리 같은 창고에 차린 카페는 나에게 일종의 복권이었고 나는 미도리씨처럼 지도에서 손가락을 찍어 우연하게도 이곳 체코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속 미도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배우기가 어렵다는 체코 말은 열심히 들어도 잘할 수 있는 방도가 없어 외워둔 몇 가지 단어들을 조합해 '100g 주세요', '큰 거', '카드로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말을 겨우 하면서 나는 미도리처럼 오늘도 혼자서 시장바구니를 들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들을 사 온다.

커피를 내리고 새로운 디저트를 시식해 보고, 메뉴판을 만들기도 하고 사진을 찍고 카페를 홍보하기도 하는 것은 그녀가 했던 일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가끔 체코 사람들이 카페에 우르르 들어왔다가 우르르 그냥 나가기도 하고, 창밖에서 열심히 기웃거리는 것 마저 영화와 같다.


가을이 다 가고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 어느 날 밤에는 시나몬롤을 만들기도 했다.

'나 이거 로망이었잖아'

효모를 넣어 반죽을 따뜻한 곳에서 발효하고 밀대로 밀어 시나몬 설탕을 바르고 김밥처럼 돌돌 말아 이음새를 꼬집 꼬집 빵 만드는 순간들에 자연스레 익숙한 영화 배경음악이 깔리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밤, 내가 있는 작은 공간이 시나몬 설탕과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는 냄새로 가득 찬 순간 아주 오랜만에 '행복'이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진 오글거림 때문인지 아무 데나 쉽게 갖다 붙이는 말은 아니지만, 갓 구운 뜨거운 시나몬롤을 찢는 이 순간만큼은 나지막하게 '행복하네'말고는 따로 불러볼 만한 단어가 없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들이여, 로망을 부디 버리지 마소서.

로망을 맞이하는 순간의 기분을 부디 만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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