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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 Jan 05. 2021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지 않는 한마디를 사랑해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잘 기억해내는 편이 아니다. 대화의 주제는 물론 어렴풋이 기억을 해낸다. 하지만 마음을 먹고 기억해내려 하지 않는 이상, 어떤 분위기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선명하게 기억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짧은 대화와 그 분위기가 있다.  

  내가 활동하던 광고동아리에서 브랜드 경쟁피티를 진행했던 날이 있었다. 원래 발표를 맡게 된 한 언니가 그 날 졸업과 관련된 중요한 일로 못 오게 되어서 내가 대신 발표를 했다. 나는 울렁증이 있어서 발표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신 발표를 하겠다고 했다. 아마 뭐든지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내 성격에, 발표 울렁증을 극복해보겠다고 나선 듯하다.


  팀장 언니와 연습을 많이 했다. 대본을 이십 번 넘게 반복하며 딕션과 로직, 문장들을 살폈다. 하지만 막상 팔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서니 횡설수설하듯 말을 해버렸고, 리모컨을 쥔 손은 춤을 추듯 떨렸다. 발표가 끝나고 피드백을 받을 때, 팀장 언니는 발표에 대한 칭찬을 받았지만, 나의 발표에 대한 피드백은 좋지 않았다. 스무 살 때라 귀엽게는 봐주었지만, 기분이 우울했다. 두 달 동안 밤새워가며 열심히 준비했던 피티를 다 망친 것 같아서.


경쟁피티가 끝나고 신촌에서 밤샘 뒤풀이가 진행되었다. 그 날은 비가 살짝 왔고, 뒤풀이가 진행된 장소는 동아리의 높은 기수부터 20년 넘게 전해져 내려오는 단골 술집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은 고삐가 풀린 듯 술을 마셨고 그 텐션은 엄청났다. 나는 반나절 동안의 긴장이 풀려서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그런 나에게 한 오빠가 술기운에 미쳐가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오더니 무릎을 꿆고 눈높이를 맞춰주면서 말해주었다. “다연아, 정말 고생했어. 해보겠다고 한 것 만으로 정말 대단한 거야. 나는 너 나이 때 발표자 해볼 생각도 안 해봤어.”하며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그 오빠랑 친하지도 않았고, 그 날 내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 정말 정확하게 읽어내서 신기했다.


  그런 말을 들은 경험 덕에 그 날의 발표 실수가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발표 울렁증을 견뎌보려는, 다시 말해 무언가를 해내어 보겠다는 스무 살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말 한마디였다. 그 상대방에게는 작은 선심에서 스쳤던 한 마디였겠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무릎을 낮추어 나의 눈높이로 말을 건네주었다. 진정한 눈높이와 솔직한 한마디가 있었기에, 그 날을 ‘발표 실수를 한, 생각하기도 싫은, 민망한’ 날에서 ‘그래도 괜찮았던 날’로 – 더 나아가 ‘힘을 받았던 날’로 지금 기억해내고 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날 발표를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냈더라면 그 따뜻한 한마디를 분명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직도 기억나는 그 상냥하고 괜찮은 한마디를 들을 수 있도록 해 준 나의 실수와 모든 상황들에 감사하다. 앞으로 나는 살아가면서 분명 더 당혹스럽고 곤란한 실수를 할 것이다. 시도에 대한 실패가 그래도 괜찮게 받아들여지는 20대 초반과 달리, 내가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어서는 질타와 책임만이 실수와 실패 후에 남게 될 것이다. 그때에도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눈높이를 맞추어 괜찮은 한 마디를 건네줄지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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