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이앤 Mar 02. 2021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김종원, 『문해력 공부』

다시는 나의 존재감을, 나의 시선을, 나의 언어를 스스로 멸시하고 방치하지 않기 위해 쓰는 독후감.1.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간절하게 준비했던 면접에서 떨어진 후, 오랫동안 열병을 앓듯 고통스러웠다. 생각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고, 생각 없이도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극을 쫓았다. 나를 오랜 시간 동안 놓아 버렸고, 다시 나를 껴안아 보듬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면접 불합격만이 그 원인은 아닌 듯 하다. 평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근육을 잘못 사용한데서 온 (=작게 사용한) 지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넓고 깊게 생각하는 대신,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무거운 고민을 자주 품었다. 그것을 나는 사색으로 자주 착각했다. 쉽게 오만해지고 쉽게 경솔해졌던, 부정적인 ‘시선 습관’을 가졌던 탓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러가지 급한 불을 끄느라,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관성을 제대로 고칠 여유가 없었다.


2.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없는 이유는 이미 눈이 충혈된 상태이기에.”“읽고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넣고 보관하는 내면이 폐허가 된 상태이기에.”“전쟁과 평화는 한 무대 위에 오를 수 없다. 모든 지적인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을 망치며 공격하는 삶을 멈추어야 한다.”문해력은 날카로운 시선과 독창적인 질문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각과 목소리에 대한 용기가, 결점과 속도를 자책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아름다운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꽤 그것을 무시했다. 정신적인 자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출혈이 오래 이어졌고 나는 희미해졌다. 절대적으로 내 것이 되어야 할 나의 주관과 목소리를 내팽겨쳤다. 글을 쓰는 전공 탓에 내 시선과 주관을 풀어쓰는 행위와 과정은 익숙했지만, 웃기게도 4년동안 나를 온전히 해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글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한 줄을 쓰기 위해, 한 줄을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멈칫했던 적은 많으나, 기억에 남는 멈칫함이 그다지 없는 것을 보면 나는 나의 시선에, 나의 존재감에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었을까. 스스로를 불신하고 하찮게 여기는 관성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나의 내면을 폐허로 이끌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나의 폐허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나를 재촉하고 자책하며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나는 곪아갔지만 완전함을 동경했다. 나는 나의 내면을 보다듬을 시간에 내면을 방치했고, 가끔씩 솟아나오는 나의 언어를 멸시했다. 면접장처럼 나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 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몸과 머리에서 맴도는 말들을 읊조리거나 나누는 것을 힘들어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말재주가 없어서 나라는 존재감을 남기는 대화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의 언어를, 나의 시선을 스스로 아끼지도 않으면서, 나는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잃어버린 채, 나는 어설프게 나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다. “언어가 힘을 발휘하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강해져야 한다. 자기 언어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나의 언어가 장악력을 지니기를 늘 열망했다. 진정한 언어의 장악력은 글을 깔끔하고 멋스럽게 쓸 줄 아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내면을 스스로 장악할 줄 알아야, 내 내면의 목소리를 ‘그저 바라만 보지’ 않아야 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명제를 나는 오랫동안 부정하고 있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경솔해지기 싫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