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쿤데라는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소설보다는 ‘키치’를 주제로 한 에세이에 가깝다고 했다. 그것을 읽고 머리가 명쾌해졌다. 인물들의 로맨스 구도, 체코의 이데올로기 등이 꽤 복잡하게 읽혀져서 ‘멍..’한 상태로 꾸역꾸역 정독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일일히 따라가려 하는 것 보다는 인물들의 캐릭터와 이데올로기 갈등이 빈번한 시대적 배경 등소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키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소설의 여운을 제대로 못 느낄 것 같다. 키치란 소설에서 설명하듯이 ‘똥의 절대적인 부정’이며, ‘인간존재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그것의 시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키치적인 것이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느끼는 감동’ 또한 ‘키치’에 해당된다. 만일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이 갑자기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것은 ‘키치’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으며, 그 대답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키치에 대해, ‘사람들이 우리를 망각하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바뀐다. 키치는 존재와 망각 간에 갈아타는 정거장이다’라고도 덧붙인다. 6부 ‘대장정’의 마지막 페이지는 프란츠의 묘비의 비문에 대해 다루고 있다. 프란츠의 묘비 <긴 미로 끝에 되돌아가다>는 종교적 상징으로 이해될 수도, 매우 세속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아직 프란츠의 묘비 메타포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키치’의 부정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키치’와의 분투로 존재한다는 것을 묘비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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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늘 생각했던 단어이다. 나는 늘 내 생각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생각해왔다. 다른 사람들이 잔디밭 위를 걸어가며 살아갈 때, 나는 심해의 바닥을 짚으며 헤엄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다. 내면 어딘가에 거대한 닻을 가진 듯한 느낌이 늘 들었다. 가볍고 경쾌해지기 위해서 나는 늘 내 안에 있는 거대한 닻을 움직여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볍게 걸음을 옮길 때, 나는 내 거대한 닻과 이상한 분투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우울함’, ‘고독함’과 긴밀한 존재는 아니다. ‘발랄한’, ‘밝은’ 얼굴을 가진 평범한 20대다. 굴러가는 고양이 털 한 가닥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유머를 건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20대 초반까지 (얼마 전까지) 내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앓았다. 마치 질병처럼 괴로웠다. 어느 날은 조증을 앓는 것처럼, 바람에 날아가는 고양이 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졌고, 어느 날은 설악산의 암석처럼 무거워졌다. 깃털과 암석의 기분을 오가며, 나는 내 삶의 의미, 내 육체의 존재의 의미를 쫓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갈 수 있었다. 카뮈와 니체의 질문 없이도, 실존주의 개념의 테두리를 만지며 성장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에서 얻은 해답은 ‘허무’였다. 허무와 눈을 마주침과 동시에, 모든 존재와 현상의 의미를 갈망하던, 나의 20대 초반은 성급하게 끝났다.
허무의 아름다움, 부질없음의 아름다움, 키치와 비-키치 사이에 놓인 어떤 아름다움이 이제는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더욱 더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허무만이 남기는, 유일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남은 인생을 버텨야 함을 이제는 알 것 같기에, 허무를 더욱 더 사랑하는 태도를 기르고 싶다.
조그마한 방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세며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기분을 자주 느꼈다. 전염병과 기후위기가 심화되어갈 수록, 그런 상상은 심각해졌다. 25살 청년의 내면이 아닌, 250살 정도 되는 노인의 내면을 겪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내면에서 노인을 내쫓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맥락없는 관조 때문에, 제대로 못 느껴본 감정과 순간이 많았다.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사랑과 슬픔의 순간들. 내 남은 20대의 과제는, 허무로움에 매몰되지 않는 연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허무에 대한 어떤 직시가 사랑과 슬픔의 나태로 변질되지 않도록, ‘허무’로 포장된 작은 아름다움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연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