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나는 남의 서재나 작업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취미를 하거나 일을 하는 공간은 그의 취향과 성격을 거울처럼 반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재는 그 사람의 내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책장을 보면 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여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골고루 훑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을 모두 알지 못했다. 수잔 손택, 브론테 자매,버지니아 울프, 한나 아렌트, 아가사 크리스티, 제인 오스틴, 시몬 드 보부아르, 실비아 플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은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조르주 상드,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카렌 블릭센,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앨리스 워커 등은 처음 접해보는 작가들이었다. 앞으로 읽어야 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음식을 해야 했던 작가들은 자기만의 서재가 아닌, 부엌의 작은 테이블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좁은 책상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탄생시켰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처럼 말이다. 물론 원래 부유했거나, 작품이 성공해서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책상에서 글을 썼던 작가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타자기 하나와 노트를 올려놓으면 꽉 차버리는 작가들의 책상이 나에게 더 다가왔던 것 같다. 나라면 저 답답한 책상에서 글을 과연 쓸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영향으로 서재를 갖지 못해 바깥에서 무릎에 종이를 대고 글을 썼던 작가들,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아침마다 카페에 갔던 작가들의 모습은, ‘작가’라는 정체성, 더 나아가 ‘직업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대작을 탄생시킨 작가의 서재는, 원목으로 된 좋은 책상과 고급 양탄자, 으리으리한 책장의 아우라에서 늘 오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서재는 글을 쓰는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쓰기를 열망하는 이의 내면, 그리고 글을 쓰느라 살짝 내려 뜬 눈빛이 있는 곳이 곧 작가의 고유한 서재이자 풍광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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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이상하다. 다른 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순간 무엇이 정답인지 깨닫게 된다. (셀마 라게를뢰프)
나는 글쓰기를 증오한다. 나는 이미 다 쓴 상태를 사랑한다. (도로시 파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이야기되는지가 중요하다. (엘사 모란테)
작가는 본래 꿈을 꾸는 사람이며, 그들이 꾸는 꿈이란 자각몽이다. (카슨 매컬러스)
적합한 언어를 끌어낸다면 무기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잉에보르크 바흐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
내게 글쓰기란 어떤 리듬을 찾아나가는 질문이다. 나는 그것을 재즈의 리듬과 비교한다. (프랑수아즈 사강)
글쓰기는 사랑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오르가슴을 의식하지 말고 그저 과정에만 집중해라. (이사벨 아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