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맵시있고 극적인 이야기. 작은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하다! 먼 거리감을 유지하며 인물의 삶을 그려내고, 이야기의 잔상들은 삶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짧은 단편 3편과 에세이 1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속도감 있게 읽었고,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상상을 세련되게 하는 작가다. 세상이, 그리고 인간이 ‘조개화’ 되고 있다는 <장인 뮈사르의 유언>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어느 날 내가 ‘조개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지점은 <변신>의 그레고어 잠자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늙어갈 수록 생각이 굳어지고 유연성을 잃는다는 것을 조개화 (석화)로 비유하다니.. 그래 바로 이거지! 하고 무릎을 쳤다.
<문학의 건망증>. 아 이렇게도 에세이를 솔직하게 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이 그대의 인생을 바꿔 두었나, 하는 질문에 작가는 ‘사실 책은 많이 읽었지만,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빠르게 꺼내기가 쉽지 않다’는 고백과 반성을 털어놓는다. 어떤 책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어렴풋이 표지의 색깔이 기억이 나거나 인물이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장면만이 겨우 기억이 날 뿐, ‘그 이상은 별로 할 말이 없다’라고 답하며 책 건망증에 걸린 스스로를 성찰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새로운 귀중한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을 지적하며 독서의 경이로움을 전달한다. 어떤 책에 정확히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는지 잊어버렸더라도, 의미는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그것은 그다지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독서 건망증’은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으면’ 해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결과물이 아닌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이며,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누가 툭 치면 툭 하고 튀어나오지 않더라도 - 나를 스쳐간 글들은 몸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