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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행기: 이방인이 아닐 수 있었던 순간들

by 은달

한국에 다녀왔다.


방문한 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다. 작년 11월에도 갔다 왔으니까. 그래서인지 특별히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살짝 걱정도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동안 머무르는데, 혼자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 가족들에게 불편을 주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 있으니 너무도 편안하고 즐거웠다. 십여 년 넘게 생활을 했던 곳이니 몸이 자연히 기억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딱히 특별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을, 잊고 살다가 다시 마주하면 마음 한켠이 온화해졌다. 오랫동안 가정주부였던 엄마가 일을 시작하셔서 직접 해주신 집밥을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식사를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시간이 되었다. 이방인이 아닌, 이 땅의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리할 수 있다는 것.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내가 비주류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니 자연스레 어깨가 펴졌던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내가 전부 알아들을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음식에서도 느꼈다. 서로 입맛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익숙하고 편안한 음식. '이럴 땐 이 음식이지!' 쿵짝이 잘 맞는 옛 친구들. 해외를 떠돌다 잠시 돌아오는 내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소중한 친구들. 어릴 적 별것 아닌 일로도 까르르 웃으며 함께 거리를 거닐던 친구들과의 추억.




부모님, 친구들,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내가 꽤나 특이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요즘엔 해외에 나가 오래 사는 사람도 많다. 다만 내 주변에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없을 뿐이다. 나의 친한 친구들은 모두 한국에서 취업을 했으며, 이미 결혼한 친구들과 결혼 예정인 친구들도 몇 있고, 앞으로도 해외에 나가 살 계획은 없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내가 스위스에 오래 거주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적잖이 놀란다. 역시 넌 대단하다며, 어떻게 거기서 사냐며.


내가 대단한 걸까?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분명 용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보다 더 힘들게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 짐작하기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치챈 것이 있다. 5년 전, 처음 스위스로 발을 내딛었을 때는 가족들과의 헤어짐이 크게 슬프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셨지만. 가족들과의 헤어짐보다는 앞으로 가서 어떻게 유학생활을 해낼지, 공부가 많이 어렵지는 않을지에 대해서가 훨씬 더 기대와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20대 초중반이었으니 어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아쉽고 슬프다. 해외생활을 하며 많은 일들을 겪어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수록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가족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닫고 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스위스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항상 눈물을 흘리게 된다. 다행히 함께 한국에 와준 남자친구가 큰 위로가 된다. 그도 올해 방문이 두번째라 한국에 좀더 익숙해졌고, 우리 부모님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헤어질 때 매우 아쉬워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그리고 이곳에 장기적으로 살 계획을 한다는 것을 아셨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딸이 이렇게 오래도록 해외에 머물 것이라는 상상을 하셨을까. 함께 밤 산책을 했을 때 엄마가 나직이 말씀하셨다. "우리 딸, 만약 유학을 가지 않고 외국인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디에 살고 있을까?" 딸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뿌듯하면서도,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말이었다. 그것이 느껴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매 주 주말을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많은 계획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였나보다. 한국 일정 중 나와 남자친구가 거제도에 머무는 일정이 있었다. 숙소가 나름 널찍한 곳이라 엄마한테 장난으로 '심심하면 놀러와~' 라고 말했는데, 정말 버스 표를 끊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이 때 아니면 언제 볼 수 있겠니 라고 하시며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번개 여행을 오셨다. 그 덕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 가족은 이런 것이구나. 시간과 상황이 된다면 최대한 자주 가까이서 보고 싶은 것이 가족이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마음.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인해 알게 된 가족의 소중함.


엄마는 내가 돌아가기 전날 다같이 함께한 식사에서 일부러 빨리 자리를 마무리하셨다. "자, 이제 갈 사람은 가야지!" 하시며 덤덤히 나와 남자친구를 보내셨다. 엘리베이터에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던 엄마.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더 밝게 웃고 계셨던 엄마. 나도 엄마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나서는 길을 걸으며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한국에 주기적으로 다녀가는데도 이 감정은 항상 힘들다. 다시 이방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돌아오는 길, 다시금 다짐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자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지구 반대편에는 나를 믿고 지지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살자고. 조금이라도 더 자주 연락하고 자주 안부를 묻자고.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고 돌아오게 된 한국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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