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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스위스, 집 안에서 도둑을 마주쳤다

by 은달

평온한 주말이었다.


요새 기온이 내려가 가을 햇살을 닮은 날씨가 가득한 날이었다. 아침에 친구를 만나 가볍게 커피 한잔 하고, 주말을 위한 장을 보고, 모처럼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편안히 쉬는 날이었다.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 있었더니 몸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져, 자기 전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했다. 약간 땀이 날 테니 창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평화로운 음악에 맞추어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순간이 즐거웠다. 나에게 집중하는 기분이었다.


요가를 마치고, 가벼운 샤워를 위해 갈아입을 잠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기분좋게 샤워한 후 몸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친구였다. 약간은 언짢은 표정으로 왜 그리 다급하게 나를 부르냐 묻기도 전,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누군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는 말을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우리 둘 다 집에 있는데, 난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급하게 침실로 돌아와 보니 침대 옆 서랍장이 전부 열려 있었다. 무언가를 뒤지고 간 흔적이 확실했다. 무언가를 훔쳐갔구나 하는 직감. 다행히 침대에 놓여 있던 새 아이패드는 이불에 가려져 있어서 그랬는지 무사했다. 없어진 것은 핸드폰과 애플워치였다. 침대 머리맡에는 평소 워치를 충전하던 거치대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쳐간 게 확실했다.




사건은 이랬다. 내가 요가를 마치고 샤워하러 간 사이, 그들은 열린 창문을 통해 우리집에 기어들어온 것이다(우리집은 1층이다. 그래도 인간이 쉽게 기어오를 수 있는 구조는 아닌데, 그놈들이 뭐 스파이더맨이라도 됐나 보다). 창문은 침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남자친구는 같은 시각 거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가 주변을 확인해보니, 거실 창문에서 보이는 앞집 유리창에 반사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가 소리를 지를 때 그들은 이미 달아나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지금 일어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워서 그저 멍했다. 경찰에 전화부터 했다. 남자친구가 없었으면 전화할 휴대폰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 후 집에 찾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 그저 벽에 기대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처음 몇 분은 당연히 놀라고 무서운 감정이 제일 강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경찰이 다녀간 후 바로 은행에 전화해 계좌부터 막았다. 내 핸드폰에는 스위스와 한국 계좌가 둘 다 등록되어 있어 전화할 곳이 여럿이었다. 한국 계좌의 경우 사고정지 신청은 유선상으로 가능하지만 정지를 해제하려면 직접 영업점에 방문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언제 갈지도 모르는데 꽤나 골치아픈 일이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으니 우선은 계좌를 정지했다.


급한 불부터 끄고 나니 새벽 2시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들은 어떻게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한 거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한국이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가장 충격이었던 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집에 있는데 들어왔다는 것. 얼마나 대담하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열린 창문을 통해 나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양인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생각했을까? 나 하나쯤은 만약 맞닥뜨린다고 해도 쉽게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얼마나 내가 만만하게 보였으면 그런 짓을 한 걸까? 그 핸드폰 오래된 거라 값도 얼마 하지 않을 텐데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을 다 헤집어 놓는 악랄한 짓을 하는 게 정상일까?


솔직히 경찰이 그들을 잡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관심을 가진다면 충분히 잡을 만한 정황이 있었다. 그들의 목격자가 있으며(남자친구와 1층의 레스토랑 직원), apple find my를 통해 확인한 핸드폰과 워치의 위치가 추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달아난 것이 확실했다. 스위스의 모든 기차역과 기차 내부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그것들만 확인해도 그들이 누군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아직 그들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깨달은 것들이 있다.


1. 사람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고 해도.


2.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없는 일에 무자비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것. 내 몫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 누구도 나 자신보다 더 나를 돌봐줄 수 없다는 것.


3. 이번 사건을 통해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


금전적 피해 외에도 보이지 않는 정신적 트라우마, 도둑이 정말로 남기고 간 것은 그것이었다. 나의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것. 그러나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타인이 줄 수 있는 도움에는 반드시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위로를 건네도, 결국 내가 받은 정신적인 피해는 아무도 보상해 줄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나 자신을 돌보고 회복해야만 한다. 경찰은 결국 피해의 규모가 크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나 또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간이란 너무나도 이기적인 존재다. 나를 포함해서. 이기심은 삶의 팍팍한 정도에 따라 더더욱 심화된다. 나 역시 한없이 이기적이며 부족한 존재다. 주변 사람들에게 좀더 따뜻해지고 싶은데, 쉽지 않다. 자꾸 나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세상에 악랄한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믿고 싶다. 세상에 따뜻한 사람들 또한 많을 것이라고.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미래에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좀더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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