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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네 번이나 이사하게 된 사연(2)

by 은달
이전 포스팅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스위스에서 네 번이나 이사하게 된 사연(1)
https://brunch.co.kr/@alpsengineer/78



스위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인구 14만의 소도시 로잔. 프랑스어권에 속한 이곳은 취리히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취리히는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라는 느낌이었다면, 로잔은 좀더 여유롭고 아기자기했다. 고상하게 들리는 프랑스어로 우아하게 이야기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아름답게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될까?


그동안 살면서 프랑스어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교환학생과 유학을 한 도시 모두가 독일어권이었으니 말이다. 특별히 프랑스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라서, 프랑스어를 배울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정말 예상치 못하게도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에서 직장을 잡게 되었으니, 새로운 인연이 생긴 셈이다. 직장에서는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영어로 해결이 가능하다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 생각이라면 불어를 배우는 것이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취리히보다는 영어가 훨씬 덜 통하는 곳이었다. 그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로잔의 임시 숙소로 이사를 오고 난 후 새로 이사갈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때다. 3개월간의 시간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로잔에서 집 구하기는 취리히보다도 어렵다고 해 서둘러 움직였다. 게다가 나는 아직 이곳에서 집을 계약하기 위한 필수 서류인 3개월치의 월급 증명서가 없었다. 외국인 신분인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집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방문한 집 앞에서 만난 현지인을 기억한다. 여유가 넘쳐 보이던 얼굴. 집주인과의 막힘없는 프랑스어 대화. 그 모든 것들이 나와는 참 멀게 느껴졌다.


취리히에서 집을 구할 때 2주 만에 이루어졌던 경험이 무색하게, 로잔에서 집을 구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다. 직장인이니 좀더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매일 퇴근하고 두 곳이 넘는 곳에 방문을 신청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낯선 장소를 구글 맵에 의지해 찾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 가보면 이미 지원서류를 품에 안고 도착한 다른 지원자들이 한가득이었다. 간절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소개서와 각종 증빙서류를 첨부해 보냈지만, 집을 구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을 주는 곳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쳐 집을 구하게 되는 건가? 3개월이 지나도록 집이 안 구해지면 어떡하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의 지원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나는 이제 막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월급 증명서가 한 달 치밖에 없었다. 일단 그것이 큰 이유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스위스에서는 보통 3개월을 수습기간으로 보기 때문에 3개월치 월급 증명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신분도 외국인이니 언제든 잘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다. 집을 보러 다닐 때 친구나 커플끼리 같이 지원하려고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집주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혼자 지원한 사람들보다 더 매력적이다. 두 명의 월급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더 안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보통 내가 원하는 집(거실에 방 하나)의 경우 집주인이 싱글보다 커플 지원서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다. 나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라 난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친구가 자신의 서류와 함께 지원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당시 우리는 로잔의 임시 숙소에 함께 머무르는 기간이 꽤나 길었고, 그는 당시 스위스에 직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독일에서의 안정적인 월급 증명서가 있었다. 그와의 관계 또한 충분히 진지했다. 나중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함께 살아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지원서류를 정성들여 작성하고, 다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세 번째 이사: 드디어 정식으로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



그의 서류를 함께 보냈다고 해서 예상만큼 바로 연락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것이다. 매일매일 집 임대광고를 들여다보고 연락을 하고 방문을 하는 일정에 지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던 어느 날 이른 아침, 기적처럼 임대를 수락하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알렸다.


그 집은 로잔 시내 구시가지의 완전히 중심부에 위치한 곳이었다. 우리가 계약할 집은 역사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의 1층에 있었고 아래층에는 (유럽은 0층부터 시작한다) 평이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다. 집 안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는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에는 어두운 베이지 마블 느낌의 스톤 바닥에 오른편에 널찍한 부엌이 있었다. 부엌의 바로 옆에는 화장실이 붙어 있었는데, 화장실 역시 벽이 고급스러운 스톤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호텔 화장실에 온 느낌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화장실이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었다.


거실과 계단 두 칸 정도의 층계를 두고 두 번째 방이 위치해 있다. 두 번째 방은 거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마룻바닥 재질의 방이었다. 가장 오른편에는 어두운 진갈색 컬러의 붙박이 옷장이 두 개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나무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로는 천장에 설치된 조명이 3개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방은 약간 사선형의 모양이었는데, 왼편에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의 창문이 두 개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구시가지의 골목이 보이는 형태였다. 전망이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유럽에 사는 기분은 낼 수 있었다.



우리가 구한 집의 거실과 화장실. 욕실 벽의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두 번째 방의 낮과 밤 분위기. 우리는 이사 후 빔 프로젝터를 설치해 아늑한 느낌을 더했다.



사진으로 보면 아주 고급스럽고 아늑해 보이지만, 이 집에는 두 가지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방을 구분하는 문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지하에 창고가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최우선순위에 있는 조건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우리를 받아들여 준 집주인에게 감사하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낯선 도시에서 내 이름이 붙여진 아늑한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로잔에서의 첫 보금자리가 생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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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이 집을 떠나게 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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