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를 낳은 후 꽤 자주 느꼈던 감정 중 하나는 '당혹감'이었습니다.수시로 울어대는 아기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난감하고, 젖을 주고 재우고 기저귀 갈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려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하지만 엄마가 되자 그 어떤 목표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30여 년을 존재했던 '나'라는 사람은 과거에 묻어 버리고, '엄마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 오직 아이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은 답답해져 갔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사라지려고 그 고생을 하며 달려온 건가 하는 허탈함이 몰려왔습니다.
점점 무기력해지고 우울해하는 저를 지켜보던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보라며 토요일 오전마다 아기를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오긴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장 필요한 육아서들을 찾아 읽었지만 점점 다른 분야의 책들도 읽고 싶어졌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입시 공부하느라 책을 많이 읽지 않았었는데, 오히려 엄마가 되고 나서 제 인생 통틀어 가장 많이 꾸준하게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 점점 눈이 떠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먼지 쌓인 안경을 쓰고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안경을 닦아 선명하게 보는 느낌 같달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그렇게 책 읽으라는 소리를 많이 하셨던 걸까요?책으로 인한 작은 변화들을 경험할수록 책을 더 제대로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분야를 골라 깊이 있게 읽어보고 싶어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분야를 파고들고 싶은지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뭘 좋아하지? 뭘 배우고 싶지?'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질문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빨리 달리려고 앞만 보며 달려왔구나 싶었습니다. 문득, 이제는 엄마가 되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아무 기대도 요구도 받지 않게 된 지금의 상황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는 기회 말이죠.
그때부터 두 가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는 나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질문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았습니다. 30여 년을 '나'로서 살아왔지만,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일은 한결같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내가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교육'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이 교육의 내용도 대상도 방대한데 특별히 어떤 교육에 관심이 있는 건지 명확하시 않았습니다. 이 관심사를 더 뾰족하게 만들어보자는 목표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고 밑줄을 치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더해서 쓰고 그것들을 정리해 서평을 쓰고 관련된 책들을 더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고, 조각조각으로 배운 것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걸로 설령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배움의 과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너무나 컸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뿌듯한 일이라는 것을 30대에 엄마가 되고 나서야 처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입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지만 그 안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내 관심사에서 출발해서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배움. 이게 '진짜 공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전 잠시 일했던 대안학교에서 만났던 청소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배움의 즐거움을 중고생 때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청소년 시기에 한 번이라도 이런 배움의 맛을 경험했더라면,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청소년들이 내가 경험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던 시간을 지나, 한 교육업체에 소속이 되어 청소년 교육을 하게 되면서 교육 관련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진로수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전공 분야도 아니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 품었던 작은 꿈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고 두려웠지만, 아이들을 향하여 가졌던 그 진심 하나로 용기를 내어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