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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의 『난치의 상상력』을 읽으면서 '아픈 것, 장애가 있음을 말하는 것에 있어서 용기가 왜 필요할까?'라는 생각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범주에 벗어났음을 알리는 것과 나 자신이 다른 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사회도, 개인인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면 나부터 장애가 있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인정하면 용기 낼 필요 없이 말할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장애를 가진 내 몸은 ‘하자가 있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자 있는 내가 뭘 하겠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점이 있듯이 장애는 나의 단점 중 일부분이다.
장애가 있는 나 자신 그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장애 때문에 연애를 못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목소리를 낮추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장애는 내 잘못이 아니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잘못이다. 사람들에게 저런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사회가 다양성이 존재하고 인정되어야 함을 계속해서 말하기로 했다.
‘장애’로 인해 기회를 제한하는 삶이 아니라 당사자가 필요하다면, 원한다면 홀로 쟁취하기보다는 사람 간에 연립을 통해 누리고 싶다.
책 『말하는 몸』에서 <장애 남성과 결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배복주의 몸 편을 읽으면서 장애를 가진 이유로 반드시 비장애인과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결혼 상대로서 좋으면 하는 거다. ‘저 사람은 장애인이라서 장애인과 결혼했네’, ‘장애인인데 비장애인과 결혼했네’라는 말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주체적으로 살기 원하듯이 장애인도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배복주 의원의 전 남자 친구들은 가부장성과 폭력성을 만난 것은 ‘장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장애인들은 ‘장애’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상대방의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성을 가진다. 내가 아닌 당신이 잘못된 행동과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