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비장애 사회에서 장애인은 맞춰야 할까?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전장연의 전시)이 지하철 시위를 왜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박경석 대표가 말한다. 계단은 우리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들은 단지 이동권이 아닌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코로나가 유행했을 때 뉴스에서 청도 대남병원 집단 감염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때 당시 뉴스 앵커가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 후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고 그것은 죽거나 치료를 위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내 귀를 의심하였다. 저 사람들은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수십 년간 해왔었다는 생각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우리는 잠깐 입원하는 것도 갑갑증을 느끼는데 이들은 참아내야 했다.
우리 사회는 책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 목숨에도 계급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차별이 따른다. 학교에서는 사람 목숨은 다 귀하다고 하였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국민들은 코로나가 걸리면 다른 생활시설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대남병원은 코호트 격리였다. 코로나가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 위험에 노출되었다. 비단 대남병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시설, 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코로나가 유행할 때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달받은 건 시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코로나가 끝나가는 시점에도 남들은 해외여행 가는데 우리는 10분 거리 외출도 제한되었다. 그 어떤 사람을 목숨도 다수와 그 누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순 없다.
우리 시설은 코로나 유행 후 올해 드디어 소풍을 갔다. 다녀온 장애인들은 소풍 담당자에게 '소풍을 다녀와서 행복했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누려야 행복이 이들이 누리기에 왜 이리 힘든가? 코로나 시국에 우리 시설 장애인이 돌아가시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서글프다. 나는 우리 시설 장애인이 국가로부터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받는 사실을 느끼고 그것에 감사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이동권, 사회권, 교육권이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앞 문장에서 주어인 사람을 장애인으로 바꾸면 권리가 아니라 배려로 바뀐다. 누구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왜 교묘하게 둔갑하는가?
이 책을 읽고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 사회에서 살기가 참으로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장애 당사자로서 언제까지 비장애인 사회에 맞춰살아야 할까?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