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단쓰기클럽 240421
오늘 클럽 모임 중 이슬님이 말씀하신 이야기가 강하게 박혔다. 누군가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려고 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로 인해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것.
사실 나는 밥먹듯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느끼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 곧 이런 일도 시작할 거고, 저런 일도 해보기로 했다!"라고 떠벌리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이슬님의 말이 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내 불안을 감추기 위해 내뱉은 말이 누군가의 불안을 키웠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문득 몇 주 전 회사 동료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지만 나보다는 연차가 높은 선배다. 이 사실만으로도 나는 종종 그녀와 나를 비교하곤 했다. 연차는 나이와 같아서 평생 역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 둘 중 누군가 이 직업을 그만두기 전까지 나는 영원히 그녀와 동갑인 후베로 남는다는 것이 때때로 나를 초조하게 했다. 그런 그녀가 직장인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아 다음 달부터 옷 수선 수업을 듣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었을 당시 나는 내가 즉시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묘한 불쾌감을 느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것이 불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와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내일배움카드에 대해 검색했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더 배우고 싶은 건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로.
최근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집』을 읽고 시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 생각은 지난주 "무슨서점"에서 진행했던 양안다 시인의 북토크에서 양안다, 오은, 박연준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더 강해졌다. 마침 북토크의 주인공이었던 양안다 시인이 한겨레에서 시 창작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하필 그 며칠 전, 시 쓰기 수업을 들을 생각이라면 한겨레로 가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내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까지 나는 시를 일종의 가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돌려 돌려 말하는 무언가 음흉하고 비겁한 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의 경험들이 내 생각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냈고, 나는 매일 아침 네이버에 한겨레 양안다를 검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감임박이라는 빨간딱지가 붙은 그 수업은 왜 며칠째 마감되지 않는 건지, 마감이 됐더라면 체념했을 텐데, 저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인가, 생각하며.
사실 그 수업을 듣는다는 건 무리다. 나도 알고 있다. 수강료는 둘째 치고, 나는 회사도 다니고 있고, 방통대 4학년에 재학 중이며, 독서모임 2개와 글쓰기 모임 2개를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 2회 PT도 받고 있다. 아, 그리고 2주에 한편씩 "한문단클럽"에 기고도 하고 있다. 이렇게 나열만 해봐도 알 수 있다. 나는 고정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로도 충분히 바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자꾸만 무언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 생기는 이유는, 특히나 최근에 시 쓰기 수업에 더 꽂힌 이유는, 아마도 몇 주 전 들었던 선배의 옷 수선 수업 수강 소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더 솔직해보자면, 사실 나는 어제 아침 "그린노트북클럽"에 참여한 후 낮 12시 반에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3시쯤 낮잠에 들어 4시간가량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고 또 유튜브를 보다가 새벽 2시에 잤다. 이런 나를 마주하는 게 싫어서 자꾸만 고정 스케줄을 채워 넣으려는 것일지도.
이렇든 저렇든 나는 불안하다. 불안해서 바쁘고 불안해서 더 바빠지려 한다. 그러다 지쳐서 주저앉아버리고 그러면 다시 불안에 휩싸인다. 평생을 이 악순환 속에 살아왔는데,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게 가장 많이 불안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불안하고, 불안하다고 자꾸 말하면서 연차 내고 낮잠이나 자고 싶은 마음에 또 불안하다.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그냥, 나 말고 나의 불안을 탓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