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롱 Sep 19. 2020

결혼하고 싶지만 분당 파크뷰는 살고 싶어

3억 전세도 못 해오는 남자는 안 된다는 엄마 말에 반감이 들다.

야, 됐어 됐어! 3억 전세도 못 해오는 애랑 뭘...

엄마가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좌우로 흔들며 반대한다는 투로 말한다. 물론 나도 결혼할 사람이 그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길 바라면서도 엄마의 태도에 반감이 들어 되묻는다.

나는, 우리 집은 뭐 할 수 있어? 혼자서 온전히 3억? 우리도 못 하는 걸 왜 남은 해오길 바라?

엄마는 말이 없다.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향후 2년 안에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 언니들을 시작으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시집을 가니 나도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식을 올리려면 돈은 얼마나 필요할까, 신혼 집은 어디로 할까, 반반 결혼이 많아지는 추세라던데 최근 결혼한 친구들도 반반 결혼을 했을까 등을 시작으로 생각은 점점 더 디테일한 윤곽을 드러냈다. 식은 어느 계절이 좋을까, 푸릇푸릇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어바웃 타임 같은 웨딩도 좋던데, 신혼 집에 방은 2개 이상이면 좋겠다, 너무 차가워 보이는 화이트 인테리어보다는 따뜻한 원목 가구는 어떨까 등을 상상하다 보면 '그래도 내가 결혼이 하고 싶긴 하구나. 난 대체 왜 결혼이 하고 싶지?' 생각하게 된다.


오빠, 돈 많이 벌어서 나 분당 파크뷰 집 사줘.
난 강아지 산책시킬 겸 카페 거리 나와 브런치 먹는 아줌마들이 제일 부럽더라.

정말이다. 아줌마 속이 어떤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카페 거리에서 고급진 커피를 마시고, 집을 장식할 꽃을 사고, 가끔 심심할 때는 셀렉트 샵에서 옷을 사는 그녀들의 삶은 꽤 편해 보인다. 아마 남편이 꼬박꼬박 두툼한 생활비를 챙겨주겠지, 혹은 자기 사업이 있어 본인이 힘겹게 일하지 않아도 고정 수입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걸 거야, 이 시간에 자유로운 거 보면 딩크족이거나 아이들을 돌봐주는 도우미 아줌마를 쓰겠지, 것도 아니면 자녀들이 제 앞가림 할 만큼 큰가 보다, 이 주변에는 일상에서도 영어로 대화하는 가족이 많던데 혹시 애들은 유학 보냈으려나 등 실제로 다양한 생각들로 나는 시나리오를 쓴다. 결국 내가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건실한 남편이 나 대신 열심히 일해서 날 먹여 살리길 바라는 걸까? 그 경우라면 확실히 내가 인간 관계와 위계 질서 속에서 겪는 속앓이는 줄겠네, 스트레스 때문에 피부가 뒤집힐 일도 없으니 좋긴 좋겠다. 하지만 그런 파동 없는 삶이 재미는 있을까?


야, 너는 절대 일 안 하고는 못 살 성격이야.
결혼했다고 너가 집에서 잘도 놀겠다!

맞다, 내 지인들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귀신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꿈에서 마저 나를 괴롭히지만 일이 없다면 내 삶의 재미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일이 내 삶의 전부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일을 통해 나는 어제보다 나은 나, 오늘보다 예쁜 내일을 만나고 성장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며, 일에서 만나는 다양한 배경의 다른 색의 사람들은 내게 엄청난 흥미와 자극이 된다. 열렬히 일했기에 퇴근 후 주어지는 저녁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집중할 수 있고,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 한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우선 순위를 재배치하게 된다. 과연 이 중요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인지,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맞는지 등을 고민하며 내 시간을 쓰는 재미를 느낀다. 결국 나는 편안함을 위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고, 고로 누군가가 나를 먹여 살리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결혼하고 싶은가?

어떨 때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애도 안 낳을 건데 결혼은 왜 하니?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

34살 정도에 결혼하고 싶다 말하니 조급해진 아빠는 늦게 결혼해 애 낳으면 기형아 확률이 높아진다며 빨리 결혼해야 한다 말했다. 그런 아빠에게 나는 결혼해도 애 안 낳을 건데 급할 것 없다 했다. 그러자 아빠가 한 말이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결혼이 무슨 의미냐는 말인데, 우리 아빠는 뼛속까지 과학자 마인드인 걸까 - reproduction(종족 번식)이 결혼의 주 목적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내게 결혼의 주 목적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세로토닌,' '안정감,' '동반자' 정도가 될 것 같다. 내가 결혼해도 괜찮겠다 느낄 때는 주로 이 사람이라면 꾸밈 없는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고, 편안하지만 평생을 함께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다. 또 나는 감정 굴곡이 큰 편인데 이런 내 마음 속 파도를 품어줄 수 있는 바다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유 없이 내가 엉엉 울어도 "괜찮아, 괜찮아. 내가 같이 있어 줄게." 나긋하지만 단단하게 말해주는 사람, 내가 날카롭게 가시 돋힌 말을 뱉어낼지라도 "흐잉~ 말 예쁘게 해줘용~" 하고 애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사실 평생이란 꽃길이기도 하고 가시덩굴이기도 한 기나긴 여정을 함께 걸을 동반자를 택할 때 돈 잘 버는 사람을 택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돈 벌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안정적인 소득이 있을 때의 삶은 천 원 아끼려고 걷고 배고팠던 학생 시절엔 없던 마음의 여유가 있다. 그 여유는 평화롭고 따뜻해서 마치 겨울 아침 따뜻한 이불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떨쳐내기 힘들다. 많은 사람이 '더럽고 치사한 직장 생활'이라 말하면서도 막상 사표를 던지지 못 하는 이유다.


소영이 너무 힘들면 회사 안 다녀도 돼.
내가 있잖아. 나한테 의지해도 돼.

물론 나도 성실히 벌겠지만, 또 쉽게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 험난한 조직 문화에서 더럽다 못해 추잡한 꼴 보기 싫은 날엔 내 최측근인 동반자가 이렇게 말해주면 정말 든든할 것 같다. 어쩌면 저 따뜻한 말이 용기가 되어 내가 더 버티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나 역시 그 사람이 같은 이유로 힘들 때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자신감 있고 든든한 여성이 될 거다. 이런 게 진정한 파트너십 아니겠는가.


결국 엄마 기대에 못 미쳐 엄마가 섭섭할 수도 있고 마냥 내가 아깝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 미래의 남편이 3억 전세를 해올 수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다만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과 꿈이 있어 내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순간에 내게 잠시 쉬어도 된다고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너라면 할 수 있어. 지금 이 답답한 시기도 너라면 거뜬히 잘 넘겨낼 거야."라고 응원해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젊고 예쁠 때나 늙고 이전만큼 예쁘지 않을 때도 여전히 내 편인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도 미래의 남편, 나 꼭 분당 파크뷰 살고 싶어!
(진지하게 궁서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