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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롱 Sep 21. 2020

내가 별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이유

내가 빛나던 미국에서도, 나로 인해 주변이 빛나는 오늘에도 난 행복하기에

넌 미국에서 훨씬 눈에 튀고 빛나 보여.
그래서 네가 미국 간 걸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훨씬 빛나 보인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눈부실 만큼 사랑 받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 아닐까. 내가 졸업 후 캘리포니아에 막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언니가 날 보러 와서 한 말이다. 그 당시 나는 두 번이나 바람 피운 똥차와 이별하고 한참 떨어진 자존감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난장판 일상을 보내던 때였는데, 다행히 언니 눈엔 여전히 내가 반짝반짝 빛나 보였나 보다.

누나 유학 보내서 우리 집 돈 없다고 엄마가 삼겹살 안 사줘!

동생이 내게 따지듯 투정할 만큼 엄마는 나를 미국에 보내 두고 항상 돈 문제로 내 속을 긁었다. 엄마가 가끔 돈을 문제 삼아 내 신경을 긁지만 않았다면 완벽한 대학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걸 보니 매우 사소한 말 한 마디였던 것 같은데, 엄마가 '돈 아끼며 사느라 고생했으니 너가 이 정도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투로 말을 할 때면 굉장히 화가 났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지금도 그 때 열 받았던 감정은 뚜렷이 생생하다.


내가 우리 집 등골 브레이커였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때문에 표현할 수 있을 때는 마음껏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힘들 것 알면서도 유학 보내줘서 고맙다고, 세상에서 이렇게 행복한 날들을 누릴 수 있는 나는 행운아라고, 이 모든 것이 아빠, 엄마 덕에 가능했다고. 또 나 역시 부모님 걱정시키기 싫은 마음에 힘들어도 힘들다 말 안 했다. 봄 방학을 맞아 친구들이 다 여행 갈 때도 나는 돈 없어 기숙사에서 쫄쫄 굶었지만 배고프다 말 안 했다. 기숙사에서 혼자 몇 날 며칠을 말 못 하고 외로울 때도 외롭다 말 못 했다. 돈 아껴야 해서 한국에 있는 가족만 고생한 것이 아니라 나도 내 나름대로 손 벌리지 않기 위해 힘들었던 기억이 많다. 내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음을 모르지 않는데 모든 걸 내 탓이라고 쏘아붙이는 엄마가 미웠다. 화가 났다. 하지만 어쩌면 그 화는 엄마를 향한 화살이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리라.


나도 널 유학시킨 것에 후회는 없어.

돈 이외의 여러 이유들로 내가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유학을 반대하던 엄마지만 엄마 역시 내가 유학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했다.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박스에 갇혀 답답해하고 뭔지 모를 화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였는데, 미국에서는 너가 자유롭게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더라.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즐거워 보였어. 동아리 회장도 하고 매년 몇 명 안 주는 리더십 상도 받고, 학교 생활도 적극적으로 해내면서 방학 때마다 인턴도 했잖아. 네 역량을 온 사방으로 펼쳐내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너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멋지게 못 자랐을지도 몰라.


언젠가 엄마는 어렴풋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엄마 마저도 기억 못 할 말이지만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남은 말이었다. 내가 유학만 안 갔더라면 우리 집은 더 잘 살았을 거라며 뾰족한 말을 하던 엄마지만, 엄마 역시 미국이 내게 준 엄청난 선물을 두 눈으로 보았구나, 빛나는 내 모습을 알아봤구나 싶어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이 싹 가시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게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강력히 말했다. 미국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는 내게 엄마는 한국에서 이름 날리는 대기업의 제안으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이 정답이라 말했다.

나는 너와 평생 떨어져 살기 위해 너를 유학 보낸 게 아냐.
학업을 목적으로 미국에 가서 목적을 이뤘으면 다시 돌아오는 게 순리야.

엄마에게는 엄마 딸이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행복하다는 말이 어쩌면 너무 눈부셔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눈으로 별처럼 빛나는 딸의 모습을 보고도 엄마는 이를 가슴 깊이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것 아닐까.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사는데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는 말이 괘씸했을 수도, 엄마 자신과 가족의 부재가 내게 큰 영향이 없는 듯 보여서 내심 서운했는지도 모른다. 내게 가족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서, 마치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골칫거리를 저 멀리 두고자 하는 것 같아서 나를 익숙함 속으로 끌어당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14시간이 아닌 1~2시간이면 볼 수 있는 거리에 나를 두고 싶었던 엄마의 불안에 대한 자기 방어였지 않을까.


소영이는 착해서 결국 지 엄마 말 들을겨.

외할머니는 나와 엄마가 미국에 남네, 한국으로 오네 한참 사투를 벌일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할머니가 맞았다. 착한 엄마 딸은 결국 엄마 말에 못 이겨 한국에 왔다. 그리고 엄마가 남들 앞에서 가슴 활짝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엄마의 자랑이 되서 기뻐야 마땅함에도 한편으로 씁쓸했던 이유는 내가 마치 엄마를 기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손끝에서 갱신되었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결말은 해피 엔딩인가?

나는 과연 한국에서도 미국에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일까?

글쎄? 남들이 보기엔 어떨까? 난 여전히 빛나는 사람인가?


사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들 생각을 중요시했던가. 결국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 게 참 마주하기 싫은 진실이라 내 생각을 말로 내뱉는 것이 두렵다. 인정하기 싫어 마음에만 품고 있던 생각을 물리적으로 또박또박 말로써 형상화할 때에 변할 수 없는 현재의 진실이 되는 것이 꽤 슬프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시작은 끔찍했지만 지금 나는 눈부실 만큼 사랑 받고 있고 꽤 행복한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 사회가 형성한 미묘한 긴장감 속에 어우러지지 못 하고 안정감 있는 노래 속 실수로 한 옥타브 빗나간 삑사리 같은 느낌이다. 사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한국의 '대부분'에 속해 보지 못 했던 것 같아 - 엄마 말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박스에 갇혀 답답해하고 뭔지 모를 화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 통속적으로 내가 이 환경에서 빛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빛나는 사람이 아니면 또 어떠하리.

오늘의 나는 또 오늘의 나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들면서 원망만 하던 엄마를 이해하게도 되고 가끔은 부모님 용돈 주는 착한 딸,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노릇도 후회 없이 할 수 있다. 오래 잊고 지냈던 가족의 따뜻함이 좋아 그들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내다 작별해야 할 때는 괜스레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다. 이 마음이 비단 우울함 뿐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 이 또한 행복의 일환이지 않을까. 내 스스로의 빛은 잃었을지 몰라도 나로 인해 주변이 빛나고, 그 것이 또 다른 별들을 만들었음에 감사한다. 고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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