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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롱 Mar 18. 2021

전세도 공짜로 사는 거 아닌데요?

분당에서 을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전세 세입자로 살면서 억울한 순간들

성남이라는 이름보다도 '분당'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힘이 더 센 곳, 가끔 어떤 사람들은 제가 분당에 산다고 부자인 줄 알지만, 저는 이 넓디 넓은 분당 정자동에 전세 세입자로 살면서 늘 을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서러운 직장인 여성입니다.

해 뜨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역

정자역에 정착한지 어느덧 4년, 작년 대비 공시지가가 38%나 올라 세금 폭탄 곡소리가 나는 이 동네에서 사회 초년생인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집은 빌라 전세 뿐이었습니다. 이 또한 80%는 부모님이 도움을 주셨고, 처음 2년은 10평도 안 되는 반지하에 살았어요. 지금보다 2년 젊었던 저는 금전적인 이유로 "지금 아니면 내가 또 언제 반지하 살겠어."라며 모두가 말리는 반지하를 호기롭게 계약했었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벌레를 잡아본 적 없을 만큼 벌레를 싫어하는 제가 반지하에 살 때만큼은 어쩔 수 없이 벌레와 동거해야 했죠. 바퀴벌레도 잡아먹는 벌레여서 착한 벌레로 알려져 있지만, 생긴 건 정말 징그러운 좀벌레, '그리마'라고도 불리는 애들이 참 많았어요.


그리마와 여름철 눅눅한 습기에 두손 두발 다 든 저는 이사를 결심했고, 이왕 이사 가는 거 이번엔 좀 넓게,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결심했어요. 싱글일 때 혼자 방 두 개 쓰고, 오로지 나를 위한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 집으로 이사했는데, 집이 넓어진 건 맞지만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집 주인이 정말 너무하거든요.


반지하 집 주인은 독하다 못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집이 안 나가서 계약 만기 후에도 제가 몇 달 더 살아줬는데, 나갈 때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전세금 빼주느라 자기 통장에 마이너스 났다고 오히려 제게 핀잔 주던 사람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어이 없는 건, 이 집 주인이 입주 계약 끝나자마자 제게 처음 한 소리에요.

집에서 라면도 먹지 말고, 삼겹살도 먹지 말아요.

라면 국물이나 삼겹살 기름을 싱크대에 버리면 하수구가 막힌다나 뭐라나... 혼자 사는 자취생이면 충분히 라면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자취생 아니어도 라면은 누구나 먹는 거잖아요. 집에서 뭘 먹든 제 자유 아닌가요? 당시 옆에 있던 저희 엄마도 상당히 기분 나빠하셨죠.


제가 복이 없는 건지 이사 온 지금 집 주인도 만만치 않아요. 사실 제가 사는 이 건물의 소유자는 할머니 아들인데, 할머니가 건물에 살면서 집 관련 문제들은 모두 돌보고 계세요. 집 계약도 할머니가 대리인 자격으로 서명하셨고, 저는 건물주 아들과 통화한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네요. 심지어 전화번호도 모르고요. 때문에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할머니와 이야기하는데, 이것 참 불편해요. 아무래도 제가 어리고 할머니는 연세가 있으시니 제게 막무가내로 구실 때가 있거든요. 제가 샤워 중이라 응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본인 할 말 있다는 이유로 제가 문을 열 때까지 문을 쾅쾅 두드리셨죠. 적당히 두드리다 그냥 가실 줄 알았는데 5분 넘게 문을 두들기셔서 머리에 샴푸 있는 채로 나와 문 열어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최근에는 화장실 배수구 물이 안 빠지기 시작했어요. 샤워하면 한 5센치 정도 물이 바닥에 고이는데, 배수구에 촘촘한 망이 설치되어 있어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안 걸러진 것도 아니고, 배수관 클리너를 사다 부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죠. 폭풍 검색해보니 배수관에 쌓인 석회가 문제인 듯 했어요. 배수구 열어보면 석회 쌓인 게 눈으로도 보이고 만질 수도 있거든요. 이 얘기를 할머니께 유선으로 전달 드렸는데, 그날 밤 제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집에 오셨더라고요. 밤 10시가 넘어 늦은 시각이었는데 저희 집에 청소 도구를 챙겨 오셔서 화장실 배수구를 청소하겠다는 거에요. 젊은 친구가 배수구 청소를 안 해서 문제인 거라며 잔소리를 하시는데, 이젠 우리 엄마도 안 하는 잔소리를 생판 남에게 들으니 매우 기분이 나빴죠. 제가 할머니께 전화 드리기 전에 청소를 안 해봤겠어요? 저 주변에 결벽증 수준으로 깔끔하다고 소문난 편이고 청소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화장실 바닥에 머리카락 하나 안 보이게 매일 샤워 후 청소해요. 그런데 깔끔하지 못한 제 탓이라며 저를 나무라시는 것이 굉장히 불편했어요. 아무리 제가 전세 사는 세입자고 이 집이 제 집이 아니라지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 집에 살 권리를 산 것인데, 이렇게 마음대로 오셔서 청소를 한다니... 기가 막혔죠. 할머니가 청소했지만 물은 여전히 잘 내려가지 않았고, 할머니는 혀를 차며 말씀하셨어요.

나는 이 건물에 10년이나 살아도 배수관에 석회가 안 보이고,
아가씨 전에 살던 사람도 문제 없었는데,
왜 아가씨 오고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아니, 배수관에 석회는 뭐 하루 아침에 쌓이나요? 고작 제가 이 집에 산 건 6개월 뿐인데, 이 모든 문제가 오래된 집이 아니라 제 탓인 걸까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지난 6개월 동안 물이 안 내려갈 때면 배수관 클리너 사다 부었던 저는 뭔가요?

사실 기분 나쁜 건 이 뿐만이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누가 휴지를 변기에 못 버려요? 대변 보고 닦은 휴지도 몽땅 휴지통에 모아 버리라고 매번 마주칠 때마다 훈계하시는데, 볼일 처리하는 것까지 제가 집 주인 간섭을 받아야 하나요? 심지어 공공 화장실도 쓰레기통 없애는 캠페인을 펼치는 세상인데... 사람답게 살고 싶어 이사 온 집에서 불청결해서 배수관이 막혔네, 휴지는 변기에 버리면 안 되네 등 제가 간섭 받지 않아도 될 부분을, 자유를 인정 받아야 할 부분을 침해 받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거죠.

회사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우뚝 솓은 정자동 아파드들

내 집 없이 산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봐요. 인간답게 살고 있지 않은 기분. 늘 을이 된 기분. 집에 문제 생기면 늘 내가 덤탱이 쓰지 않을까 마음 졸이게 되는 거... 전세든 월세든 공짜가 아닌데, 전세는 돈이 안 되니 전세 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강요 당하는 이 세상... 유별난 집 주인들 덕에 왜 내 집이 필요한지 깨달고 악착 같이 내 집 장만 꿈을 키우게 되네요.

내 집 장만을 꿈꾸며!

정자역에 우뚝 솓은 우리 회사 건물에서 넓디 넓은 정자동을 내려다볼 때면 이 넓은 땅 위에, 이 많고 많은 아파트들 사이에 내 집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꼭 내 집 갖고 싶어요. 어쩌면 나중에는 제가 만난 까칠한 집 주인들에게 고마울지도 모르겠어요. 아득바득 모아 내 집 장만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줬으니.


오늘의 이 고민도 20대의 청춘으로 추억할 수 있는 멋진 어느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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