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롱 Mar 21. 2022

드디어 퇴사

3월 22일부로 퇴사합니다.

퇴직의 시작은 ‘퇴직원 제출' 버튼 누르기.

시작이 곧 끝일 거라고 굳건히 믿었는데, 후련했는데... 아니었다.

버튼을 누르고 하라는 것을 단계별로 진행했는데, 딱히 후속 절차에 대한 연락이 없다. 알고 보니 별다른 가이드가 없어도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라네? 퇴직한다고 하니 나한테 더 불친절한 곳... (끝까지 불친절한 HR 시스템...) 일부로 퇴직하기 어렵게 만든 건가 의심하게 된다.


나는 이별에 매우 취약하다.

드세고(= 좋게 말하면 자신감 있고) 털털한 성격에 감춰져 있는 나의 마시멜로 내면은 주로 숨기고 싶은 편이다. 나는 전혀 쿨하지 않다. 심지어 질척이는 편이다. 이별에 약하기 때문인지 방어 기제는 심지어 회피형이다. 그래서 퇴직 인사도 미뤄왔다.

나중에 퇴직 날짜가 더 가까워지면 해야지.
벌써부터 이야기해서 불편한 이야기 나누는 것 싫어.
내 퇴직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도 싫어.


미루고 미루다 오늘 아침 눈 뜨고 생각해보니 내일이 퇴직일이다.

이런, 젠장!


퇴직 이메일을 대충 쓰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쿨하니까~’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몇 달 전 짧게 퇴직 이메일을 전한 김 매니저님의 이메일을 참고한다.

"10년 일했던 SK를 떠나면서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분들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입니다."

위 문장을 나는 어떻게 바꿀까 고민한다. 어떻게 표현해야 나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전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며 써내려 간다.

27살 6월,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한국 사회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의 시작이 SK여서 참 감사합니다. 18년도부터 저를 봐오신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처음에는 한국도, SK도 제게는 북극처럼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회사에 불만이 없으면 아직 직장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저를 어르고 달랬고, 내 나라에서도 ‘이방인’이라고 느끼던 때에 제가 한국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을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커리어는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SK는 제게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믿음, 일에 대한 욕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는 건강한 토양에 희망을 갖고 심은 씨앗을 잘 키워내되 SK라는 브랜드 파워 없이 온전히 제 손으로 가치 있는 것을 일궈 내보려고 합니다. 솔직히 스스로를 굳이 어려운 테스트에 내놓는 것 같아 많이 두렵지만, 이번 도전의 끝에 ‘떡상’하는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다 적고 보니 꽤 길다. 5분이면 쓸 수 있는 걸 결국 1시간을 고심해서 썼다. 너무 정 없이 딱딱하게 쓴 것만 같아서 나답게 꼰대 같은 마무리를 짓는다. 최근 내가 가장 열심히 마음에 새긴 문구를 인용해서.

p.s.
임마누엘 칸트의 행복 법칙 :
1. 어떤 일을 할 것 (업계에서 저도, SK도, 그룹 구성원 개개인도 자신의 이름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열일’합시다!)
2. 누군가를 사랑할 것 (연인 간의 사랑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죠. 사랑합니다♥️)
3. 희망을 가질 것 (Up and Down은 늘 존재하나 언제나 그랬듯 또 힘든 시기도 잘 넘길 것이고, 결국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행복의 상승 곡선을 타고 있음을! �)

이메일을 마무리하고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아, 나 진짜 SK랑 이별하네... 감정이 미묘하다. 사실 눈물을 흘릴 만큼 훨씬 더 감정적일 줄 알았는데, 이거 생각보다 속이 후련하네? 사실 눈물 흘릴 만큼 마음을 나눈 사람들은 이미 떠났거나 SK라는 물리적인 울타리 없이도 내 마음에 남았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온전히 매듭짓지 못 한 관계 때문이다. 마음을 주었는데 준 마음을 회수 못 했거나 내가 겁이 나서 회피했거나...


반성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은 답변... 퇴직 절차를 밟으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찡했다.

퇴직 이메일에 답장 주신 오 매니저님

처음 오 매니저님을 만났던 18년에는 ‘그저 재미 없는 아저씨, 똑똑한 것 같은데 융통성 없는 사람, 우리 아빠처럼 고지식한 전형적인 엔지니어’라고 단정 지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기에 관계를 맺을 생각조차 안 했다. 같이 일하면서도 솔직히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고 힘들어도 괜찮다, 오 매니저님 같은 분과 일한다면.

그저 조금 서툴 뿐이다.

본인 역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여기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오 매니저님을 ‘별난 사람’ 정도로 생각했으니 그 생각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니 오 매니저님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나이에도 항상 배우고자 부단히 애쓰신다.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신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예쁜 사람이 바로 오 매니저님이다.


앞으로는 오 매니저님 같은 캐릭터도 이방인이 아니라 ‘잘 빚어진 도자기(Fine China; 수려해서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예쁜 도자기)’로 여겨지는 한국 사회가 되기를. 물론 나 역시도 이번 도전을 통해 Fine China가 되고 싶다!


자, 이제 제일 하기 싫었던 일만 남았다.

자료 백업...

끝까지 지랄맞구나, VDI... 사실 보안상 굉장히 좋은 원칙이긴 한데, 살짝 배 아프다. 머리도 아프다 -_- 어쩌면 지난 3년 반 동안 회사는 내게 월급을 주며 내 노트를 산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든 노하우, 여기저기 흩어진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를 선으로 연결한 생각 등이 담긴 나의 다이어리를...


젠장, 그 다이어리를 포기하자니 아깝다. 포기하지 않으려 하니 일이 너무 많다. 고민하다 적당히 타협한다. 그래, 내 다이어리를 가진들 SK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수한 고민을 거친 노트, 정돈된 전략이 있다 한들 실행(Action)하지 못 한다면, 혹은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인재가 부재하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재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만 그만큼 좋은 인재들을 놓치고 있는 대기업들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나도 한때는 굉장히 로열(Loyal)했다. 먼저 퇴사하신 팀장님도 그랬다. 그냥 그 충성심(Loyalty)이 보답 받지 못 한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들었을 뿐...)


아, 하나 또 지랄맞은 건...

자녀가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내일 회사에 정리하러 나가도 우리 '애물단지(= 현재 팀장님)'를 볼 수 없다는 거. 마지막 날 배웅 받을 때에 가장 깊이 마음 나누고 신뢰하던 사람들이 없다니... 그거 참 쓸쓸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온전히 마음을 주는 것이 어렵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