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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OH Oct 20. 2023

바람이 가르쳐준 글쓰기

하이젠 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다가 바람을 보다가

서둘러 책모임을 나선다.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머리카락이 바람을 만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 오래된 나무들은 하늘만큼 키가 큰데 그 나무들이 일제히 거대한 바람을 보여주고 있었다.

차로 걸어가는 내내 마치 아이처럼 이 바람()을 보았다. 넋을 놓는다.

바람은 바람으로 볼 수 없고 바람은 바람으로 있지 않았다.

다만 방향을 잃은 채 나부끼는 내 머리카락으로 보여주고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나타나고 비둘기 똥 때문에 쳐 놓은 아파트 베란다 초록 그물의 흔들림으로 자신을 알렸다.

이렇게 쨍한 차가움이 바람이라는 것으로 내 사소한 몸을 흔들 때 비로소 무한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 싶다.


이 세계에 이 우주에 얼마나 많을까.

그 자체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들.

어떤 것을 그것으로 드러내기 위해 도구가 되는 것들.

그것을 읽어낸 채 사는 이와 읽어내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마는 이.

그 현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이들과 타인의 언어로 읽을 수밖에 없는 이들.


하이젠 베르크가 보어의 양자론에 대해 화가, 붓, 물감을 비유하는 대목이 떠올랐다.


"붓과 물감을 통한 상은 확실하지 않아.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현실과는 다르지. 하지만 화가처럼 마음의 눈으로 어떤 상을 보고 있다면, 불완전하긴 해도, 붓과 물감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어."


과학서에서 나는 인간을 본다. 인간의 모순을 보고, 모순을 가진 인간 자체에 대해 보고, 드디어 이전과 다른 언어를 해독하고, 뒤늦은 해독의 언어로 기뻐 날뛰는 나를 본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한의 일부를 포착한다고 믿는다."

보어의 말을 회상하는 하이젠 베르크.


솔직한 심정으로 요즘 나는 글쓰기에 대한 흥미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찾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에 "할 말"이 없다.

하이젠 베르크나 보어나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제껏 먹던 지루한 밥에서 탈피하는 "다른 기쁨"을 주었다.


하이젠 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대화의 정수다.

이 책으로 만난 언어를 나는, 오늘, 이 아침, "불어온 바람"에 포개었다.


자연의 진면목을 인간의 언어로 그려낼 방도가 없다.

그러나 거기서 좌절하지 않는다.

자체를 묘사할 방도가 없으면 물감과 붓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으로 찾는다.

그것이 나의 언어다.


"자연이 인도해 준 것이기에 그 형태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속할 뿐 아니라

또한 현실 자체에 속합니다. "


잘 쓴다는 건 무언가.

윤리와 도덕을 담아내는 것인가.

그들이 환호하는 선호의 단어를 남발하는 것인가.

구미가 당기는 자극제와 같은 메시지를 담는 일인가.


고백건대 나는 나의 삶을 그대로 묘사할 노력 없이 가공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글은 쓰이지 않고 바람은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 부분과 전체를 쓴 하이젠 베르크의 글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다른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바람이라는 내 언어를 만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바람이 되었다.


무한을 보려니 일부의 진실이 꺼져버렸다.

인간은 무한을 볼 수 없다.

다만 일부를 보며 무한을 느끼는 것이 최선이다.

나의 글도 일부의 진면목이 되면 좋겠다.

나의 삶도 일부의 진면목이 되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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