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꽃씨야 꽃물 먹고 눈터라 아지랑이 작은 햇봄 너를 기다린단다. 예쁜 새싹아 꽃비 먹고 자라라 꽃밭 해님 너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다 이슬 먹고 피어라 비 먹고 자라라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방긋방긋 웃는다 예쁜 새싹아 예쁜 꽃잎아 아지랑이 꽃밭 해님 너를 보고 웃는다. 너를 기다린단다.
올해 초 유이는 천마 유스콰이어 합창단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급조된 레슨을 받고 호기롭게 오디션을 보러 갔었다. 오디션 본 날 (형식적인 절차이지 않나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오디션은 오디션이다) 바로 뒤 연습까지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그렇게 유이는 일주일에 한 번 일상 속 깊숙이 노래를 넣기 시작했다.
열 살 여리한 몸으로 매주 토요일 황금 시간을 낮잠이나 놀이와 맞바꾸고 일 년이 되었다. 정기 공연을 앞두고 연습 시간이 잦고 길어지면서 몸살을 하거나 아프기도 했다. 애쓴 유이를 보면서 일 년 좋은 경험하고 다시 할 건 못된다 생각해서 솔직히 만류할 생각이었다.
여하튼 유이는 알지 못했던 노래를 더듬더듬 배워 부르더니 곧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찰떡같이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날씨가 차가워지던 어느 날 밤 별 기대 없이 그간의 수고를 격려해 줄 심산으로 꽃다발을 준비해서 공연장으로 갔다.
그런데 첫 소절을 지나고 첫 음악이 공연장을 울리는데 내 마음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보는 시선이겠으나 내게는 또한 특별한 경험이 아니겠는가.
합창 단원 속 유이는 자그만 했다. 집에서 유이만 볼 때는 몰랐는데 초중고까지 합창단으로 꾸려진 대열 속 유이는 너무 작았다. 작은 내 아이가 올망졸망 노래를 한다. 갓 터뜨릴 꽃봉오리가 내 아이 입에 달려 있었다. 노래에 맞춘 율동은 과하거나 소심하지 않았고 단정하게 아름다웠다. 딸아이에게 몰입해 공연을 지켜보는 모습을 저기 천장쯤에서 또 다른 나가 바라보았다. 그 관경도 퍽 행복했다.
유이가 합창단에서 지금 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 이 외 아름다워지고 있던 것이 또 하나 생겨났다.
토요일 1시 20분에서 3시 30분까지 매주 합창단 연습을 간다는 것은 아이를 픽업하는 내 수고와 남편의 수고가 포함된 시간이었다. 아이를 픽업하느라 든 시간이 솔직히 번거롭기도 했다. 과정을 보지 못했고 오직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는 길만 기억으로 남은 우리 부부에게 유이의 무대 위 공연은 토요일 루틴이 비로소 환희로 오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열 살이 된 일상 속 딸은 놀라웁고 기특하게 노래했다. 내 아이가 저 화음 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생경하고 뭉클한 경험이었던가. 이제껏 없던 경험을 하나 더 얻어낸 획득의 기쁨이랄까.
물론 객관적으로 돌아오자면 여느 소년소녀 합창단처럼 일반적 수준의 노래였겠으나 결코 나는 일반화 안에 있을 수가 없다. 단독적이고 유일하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유이 엄마니까.
아침에 올백 머리에 검정 망을 씌운 리본을 달아주었고 무대용 화장을 손수 시켜주었고 어제 새로 산 검정 구두와 단복을 입혀 보낸 나였지만, 나는 유이의 엄마였지만, 거기 서 있는 유이는 아침에 본 그 딸아이, 내가 매일 정리 안 하고 일찍 안 자고 군것질한다고 구박하는 내 딸 유이가 아니었다.
앙코르곡까지 마쳤다.
나는 환상에서 주섬주섬 이성을 챙겼다.
이후 우리 집 풍경에서 이상현상이 생겼다.
정기 공연에서 부른 노래들을 수시로 나와 남편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유이가 먼저 노래 부르더니 이제는 남편도 나도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노래가 시간을 타고 우리 부부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노래 부르는 내가 좋아졌다. 아이가 부르던 그 노래를 비슷하게 흉내 내는 남편이 좋아졌다.
정기 공연을 마치고 내가 말을 걸기 전에 유이가 말했다. 일 년 좋은 경험을 하고 마무리하겠다고 서로 합의한 그 영역의 말이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