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적금을 깼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아, 있네요.
지난번 아부지 환갑 꽃 케이크를 만들어야 된다는 핑계로 적금을 깼다고 말했었지요? 한번 깨진 적금은 손에 쥔 모래알 빠져나가듯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100만 원만 써야지 했었는데 그에 5배나 달하는 돈이 사라졌더라고요. 아무리 카드 명세서를 들여다봐도 정말 제가 다 쓴 돈이 맞아서 제 자신에게 정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사치는 1도 하지 않아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적금을 깬 돈으로 나의 책을 만들고,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학원을 등록하고, 마카롱을 만들어 먹기 위한 오븐과 마카롱 재료를 산거밖에 없던걸요. 그래도 처음 학교 연구소 행정원으로 원잡만 뛰며 최소 생활비만 벌 때에 비하면 지금은 오후엔 책방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쪼그라든 가난함이 조금씩 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행정원으로 일해서 번 돈을 생활비로 쓰고 책방에서 일하는 나머지 돈을 모두 저금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동생의 채찍질로 다시 적금을 들기로 마음먹었지요. 저는 예쁜 쓰레기 같은 물건을 사거나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가야지만 자극을 받고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사람으로 소비를 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는 건 정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만, 이제 저는 그럴 수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당분간 저를 죽이는 삶을 택하고 한 달에 60만 원이란 돈을 저금하기로 했습니다.
60만 원 곱하기 5개월을 하면 300만 원이나 모을 수 있네요.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러다 문득 다가오는 어버이날 용돈을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 또 20만 원을 동생에게 맡겼지요.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부지 어머니께 20만 원 밖에 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24살 때 첫 직장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70만 원이나 적게 버는 나의 삶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택한 삶이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적금에 넣은 60만 원에서 20만 원을 빼도 40만 원이나 남잖아요? 헤헤 나는 이제 돈 모으는 재미를 조금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친한 작사가 동생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언니, 00에서 000 작사가님이 수업을 한데, 언니 우리 그 작사가가 강의하면 무조건 들으러 가자고 했었잖아. 나는 그때 작사 강의가 있어서 수업은 못 듣고, 언니 생각 있으면 한번 들어보라고"
아니 이런, 뭐 이딴 개 같은 운명의 장난이 있을 수가.
이제 겨우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돈 좀 모아보려 했건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작사가 강의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이미 머리에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그 작사가는 신비주의로 유명한대다가 15년 작사가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강의를 연 적이 없는 유니콘 같은 분이셨으니까요.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그 작사가의 강의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보다 10살인가 11살이나 어린 동생은 벌써 작사가라는 직함으로 강의를 나간다는 말에 허탈해졌습니다. 나는 그녀와 하루에 수다를 2시간씩 떨만큼 친하지만 정확한 나이는 잘 모릅니다. 그간 우리 사이에는 그런 나이 차이가 전혀 문제 되지도 이야기할만한 거리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또 그녀가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녀 나의 언저리쯤엔 등록금만 축내기 바빴거든요.
한 달 학원비 40만 원.
한 달 서울 - 부산 왕복 차비 40만 원.
한 달 식비 15만 원
도합 95만 원.
하지만 늘 105만 원 정도는 쓰고 오게 되는 시나리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밤을 꼴딱 새우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마이너스 생활을 해야 하는 두근거림과 존경하는 작사가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두근거림, 잠을 못 잔 두근거림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연구소 일을 마무리하고 난 뒤 잠시 카페에 들러 휴식을 취했습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도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적금은 커녕 매달 마이너스만 쌓이더군요. 보통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학원을 다니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제가 약간 비정상인 거 다들 눈치채셨지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앞뒤 불물 가리지 않고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나는 2015년 12월부터 작사가가 되기 위해 3000만 원이란 돈을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아 물론 가슴으로만 울었습니다. 저는 다 큰 성인이라 환한 대낮의 카페에서 엉엉 울 수는 없잖아요.
나는 엄마와의 잦은 갈등으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다 결국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미미가 생각났습니다. 미미 항상 나의 슬픔과 무모한 도전과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멋있다고 해주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요. 아 이 땅에서 사라졌다는 말은 이 세상을 떴다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떴다는 말입니다. 미미는 엄마를 피해 상해로 도망치듯 떠났고 그곳에서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한 회사 과장직을 따내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온 우리는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나쳐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내 인생 자체는 개차반 일지 몰라도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일에서 만큼은 꼭 인정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프리타족이 되면서 나 스스로 만들어놓았던 텅 빈 도자기 같은 삶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진짜인 나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미미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미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내 의도는 너무도 투명했고, 내 의도를 미미도 단박에 알아챘겠죠.
미미야 적금은 몇 살까지 안 들고 살아도 될까?
나 없는데
난 빚만 있는데
안심되지?
ㅋㅋㅋㅋ
응.
미미야, 고마워, 네 말이 거짓일지라도 나는 정말 안심이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