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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문꾼 Feb 05. 2022

호구의 품격 2

 창수 말에 극단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극단이 낮에는 연극을 하고 부업으로 상황극을 연출해준다고 했다.


“간단히 하객알바 부터 이것저것 역할대행을 해주거든. 흥미로운게 커플을 갈라놓기도 한대. 내친구 얼마 전에 남자친구 역할 대행 했거든. 의뢰인의 소개팅남이 눈치도 없이 자꾸 쫓아다닌대서 보내버렸댄다.” 


 방금까지 가득했던 창수를 향한 얄미움이 금세 희미해졌다. 나의 기대감은 창수의 흥미로움과 결이 같았고, 이제부터 나와 그는 같은 배를 탄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뭐 시라노 같은거야? J랑 잘될 수 있어?” 


“아 이새끼.. 그건 너무 과해. 너 어차피 걔랑 안이어 진다니까.”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말이 아니었는데, 역시 창수 앞에선 어림 없었다. 


 창수말에 따르면, J가 다니는 동선에서 다른 여자와 나란히 걷고, 다음 동선에서는 우연히 만 나 밥을 먹으란다. 그리고 내가 먼저 아는 체 하지 말고 태연하게 연락 할 것. 핵심은 아쉬운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뭔가 덜 쪽팔리겠지? 너가 까인 게 아니니까. 이게 바로 호구의 품격 아니냐.” 


 창수의 개똥 철학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난 창수가 알려준 계좌에 10만원을 입금 했다. 그리고 그 작당모의 업체에 J의 인스타그램 계정, J와 함께했던 카톡내용, J와 겹치는 수업시간표를 보내 주었다. 


 이틀 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의뢰인님이 보내 주신 목표물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금일 14시, 망원동 비스트로에서 뵙겠습니다.’ 


 금발에 하얀 피부, 달라붙는 흰 티에 청바지가 이렇게 화려한 옷이라니.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돌려버렸다. 예쁜 여자는 몰래볼 줄 만 알았지,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다. 눈 끝에 아이라인이 새침하고 동글한 이마 때문인지 그녀의 포니테일이 돋보였다. 이소정. ㅇㅇ극단 2년 차 연습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 J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소정은 활을 든 여자 캐릭터로 몬스터를 자동사냥하며,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알려준 대로 J에게 카톡을 보냈다.


‘수업 언제 끝나? 이따 인피니티 워 볼래?’ 


 18분 뒤 답장이 왔다. 


‘나 오늘은 약속있는데ㅠㅠ 오빠가 나 과제 도와주면 내일 볼 수 있을 거 같다는?’ 


“해주겠다고 하세요. 만나서 자료도 달라고 하고.” 


 금발미녀가 지시하면 나는 카톡을 보냈다. 


“그래! 비스트로에서 봐. 냉큼 자료 가지고와ㅋㅋㅋ” 


 나와 소정은 미리 나와 J가 올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15분 뒤, 그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반대편에서 나와 소정은 나란히 약속 장소를 향해 걸었고, 그녀는 웃으면서 내 어깨를 살짝 터치했다. 차갑게 생긴 여자가 이렇게 활짝 웃어주니 자신감이 생겼다. 난 J를 보며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J는 금발의 그녀를 훑더니 누구냐 물었고, 난 친한 동생이라 답했다. 그리고 난 과제를 받자마자 다시 금발미녀와 대화를 나누며, 아니 대화를 나누는 척을 하며 계속 걸었다. 그녀는 계속 내 팔을 터치하고, 내 옷가닥을 잡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날 저녁 J에게 카톡이 왔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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