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억, 2010
여행이 시작된 곳은 이륙을 기다리는 비행기 안이었다. 주위에서 대책 없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책을 펴 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승무원들이 다니며 승객을 점검했다. 특히 내 옆자리에는 10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탄 어머니가 있어서 승무원들은 더 신경을 썼다. 이미 그들을 생각해서 자리를 바꿔준 상태인데도 오지랖 넓은 한 현지 승객이 나에게 저 가족들을 위해 자리를 바꿔주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승무원을 보고 웃었다. 승무원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문제없다고 답해주었다.
한 승무원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장 쉽게 건넬 수 있는 말, 어디 사람이세요?
"한국이요. 남쪽."
"여행 가시나요?"
"네."
"예멘에서는 뭘 하시죠?"
"일(work)이요."
"네? 예멘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죠?"
필리핀 사람인 그 승무원의 질문에서 느껴진 뉘앙스는, 당신 같이 잘 사는 나라 사람이 예멘 같은 가난하고 소망 없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그 질문을 넘겼다. 승무원도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한국에서 살았으면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먼 타지, 그것도 자국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말인가. 자고로 일이란 어떤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아직까지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강하게 어필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그 누군가의 질문과 생각이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만 암시해주고 싶을 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그 사람의 몫이다.
필리핀 승무원과 대화를 마친 후 느낀 것들을 노트에 적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 작가냐고 묻길래 웃으며 아니라고 했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갔고 금방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봄방학 때 혼자 떠난 배낭여행이다. 배낭에 간단한 옷가지와 책, 수건 세면도구 등만 넣어서 무작정 기차역으로 떠났던 그때 나는 그저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정류장에서 차를 태워주었던 한 아저씨나,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 아들이 서울서 대학 다닌다며 무한대로 밥을 주었던 식당 아주머니, 어린 여행객에게 친절하게 경주 여행을 설명해준 관광회사 아저씨 등 여행 중에 반가운 것은 뜻밖의 사람들이다.
고 2 여행 때 월출산을 갔었다. 자고로 산은 혼자 타는 게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산 입구에서 혼자 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같이 산을 올랐다. 그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졸업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3월이었고 산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았었다. 여행 정보지에서 월출산에서는 무슨 계곡에 있는 다리가 볼거리라고 했기에 나는 죽어도 그 다리는 보고 내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하산하는 어르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얼어 있는 산을 기어가다시피 해서 그 다리까지 갔다. 과연 힘들게 올라간 보람은 있었다. 시간이 늦은지라 오래 있지 못하고 바로 내려와야 했다.
터미널로 오는 버스는 전형적인 시골 버스의 분위기였다. 음악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누나와는 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산행 후 너무 배가 고파 순두부찌개를 사 먹었는데 그 맛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버스와 기차로 채워졌던 10대의 여행이 이제는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비행기 여행이 되었다. 이국적인 것도 좋고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여전히 나는 '여행' 하면 그 파릇파릇했던 10대의 여행이 떠오른다. 누구의 허락도 없었고 누구의 지도를 받을 필요도 없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10대의 끝무렵 나 자신과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여행이었기에 내 머리와 생각에 그토록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20대의 끝무렵, 나는 또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나라들로. 비행기에서의 내 마음은 차분했다. 여행에 가장 적합할 것이라 여겨져 선택한 책은 기대 이상이었고, 애인이 깊은 배려심으로 여행 전에 급하게 보내준 MP3는 시끄러운 비행기 속에서 더없이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어느 때의 여행과는 다른 마음이었다. 아마 그 출발지가 한국이 아닌 예멘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곳도 예멘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