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조합 결성 과정이 내게 남긴 인사이트
드디어 펀드를 클로징(closing)했다.
몸담고 있는 벤처캐피털에서 작년 말 한국에 GP(General Partner) 역할을 하는 법인을 만들고 운용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창업기획자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한국 소재의 펀드(Korea-domicile fund)인 벤처투자촉진법상 벤처투자조합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협상과 번역과 프로세스 셋업과 서류제출 과정을 거쳐 마침내 7월에 등록원부가 나왔다. 감격스러운 순간, 쾌재를 불렀다. 처음 해당 회사에 합류하고 최우선 순위이자 고강도로 관여했던 프로젝트가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
서로 다른 한국과 해외의 벤처 생태계에서 비롯된 소통의 괴리
수 개월 간의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었다. 첫째로는 국내의 사정과 관행에 대한 이해가 없고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본사를 납득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관행과도 같은 프로토콜(protocol)이 굳어있는 국내의 기관 LP(Limited Partner)들에게 다국적(multinational) 금융회사인 우리의 내부 규정과 절차를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끝없는 핑퐁 속에서 조율을 해나가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같은 뜻을 향해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고, 좁아질 것 같지 않던 폭이 줄어 결국에는 협의의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조항은 저절로 암기가 될 정도로 국내와 미국 표준 규약을 라인 바이 라인(line by line)으로 읽으면서 느낀 것은, 서로가 스탠다드라고 믿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비롯된 거리였다. 결국 국내와 해외의 기준 지표가 다른 것은 국내와 해외의 서로 다른 벤처 생태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했다.
본사에서 준용하는 기준은 아무래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자주 이용하는 미국 델라웨어(Delaware) LLC를 활용하는 펀드 구조인데, LP 풀(pool)이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벤처자본에 대한 정부 규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미국의 경우에는 GP의 재량권이 상당히 크고 일부 리포팅 의무를 제외하고는 LP의 관여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 국내의 경우는 정부예산이 벤처펀드의 출자금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국모태펀드, 한국성장금융, 그외의 국책기관들을 제외하고는 민간 자본만으로는 사실상 벤처펀드 조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예산에 상당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정부예산을 소요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철저히 해야한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GP의 재량권이 미국보다는 적고 LP의 관여가 더 클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LP들은 가장 많은 출자를 하는 한국모태펀드의 기준규약을 토대로 삼는다. 규약 뿐 아니라, 한국의 벤처펀드 구조도 미국이나 여타 국가들과 사뭇 다른데, 국내에서도 운용사에게 상당히 재량권이 있는 기관전용 사모투자합자회사(private equity fund)와 달리, 벤처투자조합(venture equity fund)은 한국벤처투자협회와 중소기업벤처부의 관할 아래 촘촘한 규율 시스템 속에 있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히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GP-LP로 이뤄진 위임의 구조를 살필 때, 자산운용 전문가인 GP에게 보다 많은 재량권이 주어지는 미국의 모델이 더 본연의 자산운용의 의미에 가깝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국내 스탠다드의 존재 이유는 이해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벤처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해서 정부자본 외에도 민간자본의 흐름을 유인하는 것인데, 대체투자(alternative investments)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경제의 흐름은 차치하더라도 결국은 탈세 우려 등의 이유로 가로막혀 있는 신탁제도 활성화와 같은 정책적, 제도적 정비가 선행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른다고, 많은 부분 국내의 기준을 준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내 기관에게 새롭게 글로벌 기준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었고, 기존 제도의 타성에 젖어있던 나 또한 본사의 수많은 신선한 질문들 덕분에 새로운 시선으로 벤처생태계에 대해 다시끔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글로벌 접근성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우리 팀이 차차 풀어나가야 과제를 깨달은 모먼트이기도 했다.
0 to 1, 스타트업 정신으로 무장한 VC
총무팀과 펀드관리 담당이 따로 있었던 전 회사나 펀드 관련 업무를 모두 아웃소싱했던 전 의뢰인과는 사뭇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0 to 1을 해내야 했다. 우리 회사는 글로벌 차원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벤처캐피털이지만, 한국 사무소는 소위 ‘작고 강한 팀’으로 이뤄져서 각 인력이 2–3인분의 역할을 소화해내야 한다. 법률 검토와 프로젝트 관리부터 은행 방문과 번역과 간인 날인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우리 팀은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다시 한번 스타트업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전 회사들이었다면 총무팀이나 비서에게 넘길 일들까지 손수 하면서 행정 절차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글로 쓰면 얼마 안되는 일도 직접 수행하자면 수없이 자잘한 단계로 이뤄져 있다. 인력이 충원된다면 어쩌면 더 이상 내가 하지 않을 일이겠지만, 모든 세세한 디테일을 안다는 것은 때로는 자신감을 주기도 한다. 누가 물어본다면, 적어도 관련해서 어떤 절차든 자신있게 알려줄 수 있다. 가끔은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이 또한 스타트업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한 대표펀드매니저의 혜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 갈 길
이번 펀드를 만들기 전에도 한국 지사에서 2015년부터 이미 50개가 넘는 한국회사들에 투자를 해왔지만, 대상회사들이 한국 소재였던 것이지 펀드 자체는 해외에 소재한 역외펀드였다. 한국 소재 펀드와 운용사가 생긴 이제, 어쩌면 더욱더 본격적으로 한국 투자를 활발히 하고 국내에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포부에 따른 의사결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미국 본사 출장을 위한 비행기 안에 있다. 인터넷 연결이 끊긴 바람에 본의 아니게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데, 돌아보면 올해 초 이 팀에 합류하고 많은 일들을 했고 많은 배움을 얻었다. 여전히 당면하고 있는 일들도, 예상치 못했지만 자꾸 튀어나오는 일들도 많지만, 나의 스킬셋과 우리 팀이 한국 벤처생태계 내에서 일궈내어야 할 중장기적인 과제들의 접점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되묻게 된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요즘이다.
본 글은 저자의 철저하게 개인적인 의견으로, 관련 기관, 조직, 개인등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본 글은 법률이나 투자 관련 조언을 제공하는 목적이 아니며, 본 글을 기반으로 투자 결정을 내리거나 관련 지침으로 활용해서는 안됩니다. 특정 회사나 투자에 대한 언급은 정보 제공의 목적일 뿐, 투자에 대한 추천의 목적이 아님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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