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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양 Apr 26. 2021

뿌리는 나무

[vol 2.] 버려진 화분


생각을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야 한다, 혹은 생각만 하지 말고 시도부터 해라. 

자기 계발과 심리를 파고들다 보면 공통되는 지점이 있다. 인과관계가 있어 ~해서 ~게 되었다는 이야기. 바넘 효과로 무엇이 되었든 전부 내 얘기 같은, 그 당시에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지나고 보면 희미한 이야기들.


지난 글들을 되짚어 보면 나의 글 들은 나를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거나 드러내기를 꺼렸다. 물론 자기 고백적이고 쏟아내기 위한 검열을 거치지 않은 글들은 따로 쓰고 있다. 보통은 자신을 표현하고 독자가 거기에 공감을 해주고 소통하는 지점이 있을 진대, 내 안의 칠흑 같은 어둠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철저히 감추고, 지우려는 태도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말을 하기 더 쉬울 진데,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한번 쏟아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안의 부정을 나와 동일시하고 철저히 존재를 지우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쏟아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감정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도, 거슬러 올라가 창작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자신에게 숨구멍을 내주기 위함이다. 깨닫기 전에 작품으로 인한 앞으로의 삶의 방향이 보이기도 하는,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나, 그 안의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삶의 원동력이자 자기 발견의 척도가 되는 것이 창작의 이유이다. 다시 돌아가서, 앞서 말했던 자기 계발과 심리학에서의 공통적이기도 일률적인 결과들에 나를 끼워 맞추지 말고, 과거에 이랬다면 앞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에 대한 머리로 아는 상식이 아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했다. 알아야 함을 느꼈던 건 모르기에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부정적인 패턴을 깨버리고 새로운 시선으로 보기 위함이다. 모르기에 내가 아는 만큼밖에 상상할 수 없으니. 


나는 왜 스스로를 억제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에 대한 질문. 예측 불가하고 모호한 것에 대한 불안 그 이상의 수치심과 감당할 수 없음을 넘어,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으리만치 오래된 이러한 사고방식이 심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멀리서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두려움 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사랑이다.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의 힘. 예전에는 말할 수 없었던 이 두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어 어찌나 행복한지. 나에게 창작의 행위는 그런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지나 다음을 준비한다. 내가 몰두하고 있는 현재는 느렸지만 그 방향은 나아가고 있다. 어제의 1도가 쌓여 오늘의 2도. 내일의 3도. 좋은 쪽이라고 하지 않겠다. 나다운 방향의 3도로.


ⓒ 美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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